《벨아미》 by 기 드 모파상
프랑스는 혁명 이후 자유, 평등, 박애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누구나 같은 기회를 누리는 평등 사회를 지향해 왔지만, 현대 프랑스는 오히려 사회적 이동성이 낮은 국가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실제로 최근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부모의 소득과 사회적 지위가 자녀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큰 편으로 나타난다. 특히 교육과 직업 선택에서 그 격차가 두드러진다. 부모가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저소득층일 경우, 자녀가 엘리트 교육 코스를 밟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는 보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계급이 없는 평등한 공화국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여전히 강한 계층적 구분이 존재한다. 학교 교육부터 이미 그 구조는 고착화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명문 고등학교(lycées)와 그 출신자들이 진학하는 그랑제콜(Grandes Écoles) 시스템은 상류층과 중상층 가정의 자녀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교육 격차는 곧 직업 격차로 이어지고, 문화적 자본(언어, 교양, 인적 네트워크 등)의 차이 역시 계층 간 벽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서도 여전히 사람을 판단할 때 출신 지역, 직업, 말투, 학교 이력 등을 은연중에 따지는 문화가 남아 있다. 파리 대도시권과 지방 간의 격차도 여전하고, 이민자 가정 출신이나 노동 계층 출신들은 엘리트 집단에 편입되기 어려운 구조적 장벽에 부딪힌다. 계급은 더 이상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비공식적인 신분제’처럼 작동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때문에 프랑스의 젊은 세대는 점점 더 '출신 배경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로 인해 사회 전체의 좌절감과 냉소적 태도는 오래된 갈등 중에 하나이다. 불평등을 단순히 빈부 격차가 아닌 계층 간의 고착과 불공정한 기회 구조로 인식하는 흐름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이러한 현실은 최근에 갑자기 생긴 현상이 아니다. 이미 19세기 말, 프랑스는 근대화를 겪으며 겉으로는 계급 이동이 가능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출신과 배경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평등한 사회의 옷을 입었지만, 그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던 계급적 위계와 위선, 그리고 계층 간의 암묵적인 장벽은 수면 아래에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난 문학 작품이 바로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장편소설 《벨아미(Bel-Ami)》이다. 이 소설은 하층민 출신의 조르주 뒤루아(Georges Duroy)가 파리 언론계를 무대로 상류 사회로 편입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의 여정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민낯을 신랄하게 드러내고 있다. 뒤루아의 성공은 표면적으로는 계급을 초월한 듯 보이지만, 그의 출세 과정 속에는 오히려 계급 간의 위선, 차별, 타락한 도덕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작품은 단순한 시대소설을 넘어, 계급의 허상과 인간 욕망의 본질을 통찰하는 사회 비판서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왕정과 제국, 공화정이 교차하며 권력의 주체가 계속해서 바뀌었고, 결국 1870년에는 제3공화국(La Troisième République)이 수립되었다. 표면적으로 공화정은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앞세웠지만, 사회 구조는 여전히 계층적 위계와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전통적인 귀족 계급이 점차 영향력을 잃고,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사회의 중심으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부를 축적한 상인, 은행가, 언론인, 고위 관리들이 사회적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고, 권력은 더 이상 혈통보다는 자본과 정보,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귀족 계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사회적 권위와 문화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전통적인 예절, 언어 습관, 교육 방식 등을 통해 상류층의 기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주도권은 부르주아가 가져갔지만, 사회적 지위의 상징은 여전히 귀족 문화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새로운 사회 계층 간의 긴장과 위선, 갈등을 낳는 배경이 되었다.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등장은 겉으로 보기엔 계급 이동의 가능성을 넓힌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사업, 언론, 정치 활동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하지만 단순한 경제적 성공이 곧바로 사회적 인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시대의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출신 성분, 가문, 교육 배경 같은 요소들이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부르주아가 상류층으로 완전히 편입되기 위해서는 경제력 외에도 특정한 사회적 자본이 필요했다. 그들은 상류층의 예절을 학습하고, 적절한 사교 모임에 참석해야 했으며,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옷 입고 행동해야 했다. 이른바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법을 익히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문화적 코드에 접근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부유해도 속물, 촌스러운 졸부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이런 시선은 계급의 벽이 단순히 돈으로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한 규범과 기대, 상징 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들만의 기준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다양한 장벽을 만들어냈다. 겉으로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상은 문화적 장벽과 사회적 폐쇄성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말투, 식사 예절, 문학적 취향, 정치적 성향, 심지어 사교 모임에서의 대화 주제까지를 통해 폐쇄성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파리의 상류층은 라틴어 교육, 고전 문학 독서, 특정한 고급 프랑스어 억양을 공유했다. 이런 문화 자본은 단순히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사회적 구별의 도구로 작용했다. 이러한 문화적 요소는 교육을 통해 유전되었고, 하층 계급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폐쇄적인 상징체계를 형성해 냈다.
또한 정치와 언론, 고등 교육 기관은 대부분 상류층 출신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끼리의 네트워크는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다. 겉보기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배타적인 공간들이 주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당시 프랑스 사회는, 계급이라는 단어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계급적인 삶의 방식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사회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뒤루아 같은 인물에게 계급 상승의 꿈을 꾸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면과 거래, 타협이 필요한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만들었다.
소설은 젊고 잘생긴 조르주 뒤루아가 파리의 거리에서 빈털터리로 걷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알제리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지만, 전역 후 파리에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철도 회사에서 형편없는 급여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과시욕과 낭비벽으로 늘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상류 사회의 화려함을 동경하면서도 그 벽을 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고 있던 어느 날, 뒤루아는 우연히 옛 군 동료인 샤를 포레스티에를 만나게 된다.
포레스티에는 현재 유력 신문사 『라 비 프랑세즈(La Vie Française)』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성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인물이다. 뒤루아의 궁핍한 처지를 알게 된 포레스티에는 그를 신문사에 추천해 주고, 자신이 출입하는 사교 모임에도 초대한다.
사교 모임에서 뒤루아는 알제리 식민지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하면서 관심을 끌게 된다. 신문사 사장인 월터 씨의 눈에 들어 인터뷰와 기사 요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글쓰기 실력이 부족했던 뒤루아는 기사 작성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결국 포레스티에의 아내, 마들렌 포레스티에의 도움을 받아 기사를 완성하게 된다.
마들렌은 지적이고 정치 감각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신문과 정치의 이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사의 구조와 내용을 즉흥적으로 구성해 뒤루아에게 불러주고, 덕분에 그는 정식 기자로 채용된다.
뒤루아는 철도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언론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하지만 포레스티에는 그를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부하 직원처럼 대하며 무시하고, 뒤루아는 처음으로 사회적 경계와 권력관계를 느끼게 된다.
이후 뒤루아는 기사 작성에 여러 차례 실패하면서 좌절하지만, 차츰 사회성, 매력, 언변을 바탕으로 기사 외적인 능력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한편 그는 포레스티에의 친구이자 유부녀인 클로틸드 드 마렐과 관계를 맺게 된다. 클로틸드는 사교계에서 세련된 존재감을 가진 인물로, 뒤루아는 그녀와의 연애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신분 상승과 상류층 여성을 통해 사회적 자본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포레스티에의 건강이 악화되고, 뒤루아는 마들렌과 함께 그를 간병하게 되면서 둘 사이에 감정적 긴장감이 고조되게 된다. 포레스티에가 프랑스 남부로의 요양 중 사망하자, 뒤루아는 즉시 마들렌에게 청혼을 한다. 마들렌은 독립적인 여성으로서 한동안 망설이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결혼을 수락한다.
결혼 후 뒤루아는 마들렌을 통해 정치계 고위층과의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외무부 장관 라로슈-마티유와의 관계를 얻게 되고, 점차 정치 기사까지 다루며 영향력을 확대해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포레스티에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모욕감을 느끼게 되고, 점점 마들렌과 갈등이 깊어지게 된다.
뒤루아는 마들렌이 외무부 장관과 불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된다. 이를 경찰에 고발해 간통 현장을 급습하도록 조치하면서 이혼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문사 사장 월터의 아내인 버지니 월터 부인에게 접근하여 유혹하고 연애 관계를 맺지만, 곧 그녀를 이용가치 없는 인물로 판단하고 냉정하게 버리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 와중에, 프랑스의 모로코 식민지화 계획이라는 외교 정보를 월터 부인에게서 얻게 되고, 이를 기사화하며 언론의 힘을 실감한다.
마지막으로, 뒤루아는 월터 부부의 어리고 순수한 딸 수잔 월터를 결혼 상대로 점찍고 계획적으로 접근한다. 두 사람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피행각을 감행하면서까지 수잔의 결혼 승낙을 받아내게 된다. 뒤루아는 마침내 귀족 작위와 막대한 재산, 그리고 언론사의 지배적 위치까지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결혼식 당일, 뒤루아는 클로틸드 드 마렐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생각을 떠올리면서, 이제는 모든 것을 가진 듯한 만족감 속에 권력과 사회적 성공의 절정에 올라선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19세기 프랑스 사회, 특히 파리처럼 계급 구분이 분명한 도시에서는 개인의 본질보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훨씬 더 중요했다. 소설 속 뒤루아는 하층 계급 출신이라는 사회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보여지는 모습을 관리하고, 사회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상류층 남성의 이미지를 연기함으로써 성공을 쟁취했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개인적 성공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계급 차별이 평판이라는 형식으로 얼마나 은밀하게 지속되는지 보여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뒤루아는 처음부터 언론인이 될 능력이나 자질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군 복무 외에 별다른 경력도 학식도 없고, 문장을 다루는 능력조차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우연히 만난 옛 군 동료이자 유력 신문사의 간부인 마들렌에 의해 기자로 데뷔하게 된다. 이때부터 뒤루아는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자신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옷차림을 상류층답게 바꾸고, 고급 사교 모임에 얼굴을 내밀며, 상류층 여성들과의 연애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자신이 쓴 것처럼 보이는 기사는 사실 남의 글을 빌린 것이었고, 능력 없는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항상 적절한 인맥을 이용했다.
뒤루아가 가진 능력은 단순했다. 자기 자신을 사회가 원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맞추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포장 능력은 실제보다, 능력 있어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힌다.
이처럼 좋은 평판은 개인의 진정성이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기존 지배 계층이 정해놓은 외형적 기준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뒤루아는 그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데 성공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진짜 모습은 점점 더 사회적 이미지 속에 묻혀 사라져 갔다. 그는 결국 상류 사회에 들어가게 되지만 계급을 초월한 것이 아닌 계급의 틀 안에 스스로를 집어넣고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뒤루아는 차근차근 사회적 지위를 쌓아가며 결국 귀족 가문과의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겉보기엔 하층민 출신이 파리 상류층에 당당히 입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속으로 느끼는 불안, 소외감, 그리고 끊임없는 허세는 그가 진정으로 계급 상승을 이뤄낸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상류층 인사들은 그의 외모나 매력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를 진심으로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교육, 말투, 문화적 배경에서 오는 미묘한 차이는 뒤루아의 사회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었고, 그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더 화려한 외양, 더 강한 권력, 더 많은 여성 정복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계급 이동의 허상을 보여주고 있다. 겉으로는 벽을 넘어선 것처럼 보여도, 그 내부에서는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중적 구조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엘리트 교육이나 취업을 통해 상승했다고 평가받는 이들이 여전히 문화적 차이, 정체성의 괴리, 내면의 열등감을 겪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뒤루아는 계급의 문턱은 넘었지만, 그 안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남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작품은 언론과 권력의 결탁, 그리고 그 안에서 계급의 재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은 언론이 급격히 성장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언론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로 인쇄기술의 발달과 도시화, 문해율의 증가로 신문은 대중에게 빠르게 확산되었고, 여론을 형성하고 조작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여론이라는 것이 진정한 공공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권력자와 자본가들이 사회를 통제하고 계급 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뒤루아 역시 언론이라는 계단을 타고 상류층에 편입되지만, 그의 이야기는 언론이 단순한 출세 수단이 아니라, 계급 사회의 핵심 기제로 기능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회적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 있다.
뒤루아는 처음 신문사에 입사했을 때, 정치나 외교에 대한 지식도 없고 글쓰기 능력도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곧 정치적 이해관계와 사적 이익이 언론 기사에 어떻게 개입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뒤루아는 자연스럽게 그 논리에 순응하면서 언론을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신문사 편집인과 정치인, 재계 인사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기사 하나가 기업의 주가를 움직이고, 여론 조작을 통해 식민 정책이나 외교 전략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상류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목표를 위해 신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기사 내용은 진실보다는 목적에 맞게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오늘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인식과도 닮아 있다. 언론이 권력 감시자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결탁한 조율자로 기능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보의 왜곡과 공공성은 훼손되었고,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피해를 보아야 했다. 작품은 이미 19세기 말에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언론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엘리트 계급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전락하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언론은 겉으로 계층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뒤루아 역시 언론사를 통해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고, 실제로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작품 속 언론은 진정한 능력이나 성과로 평가되는 공간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맥, 가십, 조작, 권력자와의 결탁 같은 비공식적 자본이 지배하는 폐쇄적 클럽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뒤루아는 기사 내용을 결정하는 데 있어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보다는 정치 후원자의 입맛에 맞춰 움직이고, 기사로 공격과 비호를 반복하면서 결국은 정치권력의 일부로 흡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언론의 권력화는 뒤루아 개인의 성공에 기여하지만, 사회 전체에서 봤을 때 언론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계급 간 간극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언론계는 하층민에게 계급을 넘는 문처럼 보이지만, 그 문 너머에는 이미 짜인 규칙과 권력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 뒤루아가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적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기존 권력 질서에 자신을 맞춰 연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이 단순한 정보 매개체가 아니라, 사회적 위계를 정당화하고 고정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뒤루아의 계급 상승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가 저널리스트로서 쌓은 커리어나 정치적 수완보다도 먼저 그가 어떤 여성과 관계를 맺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 여성은 단순한 연애 상대가 아니라, 뒤루아의 사회적 입지를 결정짓는 열쇠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사랑과 결혼은 순수한 감정의 결과로 그려지지 않는다. 남녀 관계는 철저하게 계산되고 활용되는 사회적 전략 관계로써 동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뒤루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인생을 꾸려간다는 감정적 의미보다는, 누구와 함께하면 내가 더 멀리 올라갈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보다 거래
뒤루아의 첫 번째 여성 관계는 클로틸드 드 마렐이었다. 그녀는 부유한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기혼 여성으로, 파리 상류 사교계에 속해 있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뒤루아가 상류층 여성들과의 연애를 통해 어떻게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구축하는지를 보여주는 첫 시도였다. 뒤루아는 마레유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가진 세련됨과 사회적 위치, 그리고 그녀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인맥을 이용했다.
이후 만난 마들렌 포레스티에는 뒤루아의 사회적 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마들렌은 단순한 상사이자 친구의 아내가 아니라 사실상 기사를 직접 작성하고, 외교·정치 정보를 조율하며, 사설의 방향을 결정하는 실질적 브레인이었다. 당시 여성에게 공개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던 정치적 영향력을, 마들렌은 남편의 뒤에 숨어서 우회적으로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루아는 마들렌의 재능과 지성, 그녀가 쌓아온 정보망과 사교 관계를 적극 활용해 저널리즘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장해 나갔다. 마들렌이 병으로 약해지자, 그는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마들렌과 재혼할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이 결혼은 권력과 정보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고, 한 여성의 감정과 상처를 철저히 이용한 냉혹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뒤루아는 마들렌과의 관계가 더 이상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거리낌 없이 그녀를 배신하고 떠나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선택한 또 다른 희생자가 바로 신문사 사주의 딸이자 귀족 가문 출신인 수잔 발트르였다. 수잔은 어린 나이의 순진하고 순수한 소녀였다. 하지만 뒤루아는 그녀에게 접근할 때조차 감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마들렌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수잔을 유혹해 결국 결혼에 성공하고 귀족 작위를 얻게 된다. 이로써 그는 외형상으로는 완전한 상류층 귀족의 일원이 되는 데 성공한다.
뒤루아는 여성들을 출세의 도구로 이용한다. 하지만 모파상은 이 여성들을 단순히 남성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은 사회적 영향력의 주체이자, 지적 역량을 가진 인물로 그리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들렌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언론계에서 실제 기사 작성을 주도하고 남편보다 더 정세에 밝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결혼 제도를 활용해 권력에 접근하지만, 동시에 성별에 따른 한계에 부딪혀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발표할 수 없는 현실을 철저하게 인지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모파상은 여성들의 행동을 통해, 사회 구조 안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이려는 여성의 의지와 동시에 그녀들이 부딪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여성은 때론 남성보다 더 스마트하고 영향력 있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그 영향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결국 배제되고 소외되는 또 다른 계층으로 그려지고 있다.
뒤루아는 여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결국 귀족 가문의 일원이 되고, 작위를 얻게 된다. 그는 더 이상 하층민 출신이라는 낙인이 드러나지 않는 외형을 갖추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계급 상승은 스스로의 능력이나 고귀한 가치, 인격적 성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뒤루아는 타인의 감정을 이용하고, 인간관계를 전략적으로 설계하면서 어떤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상류층으로 들어서게 된다. 결국 그가 얻은 성공은 인정이 아니라 포장된 편입으로 읽혀진다. 이러한 그의 성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존경보다 공허함이 먼저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뒤루아의 계급 상승은 그 자체로 위선과 기만의 산물로써 그려진다. 소설은 뒤루아라는 캐릭터를 통해 계급 이동이란 단순히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넘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 윤리, 관계,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훼손되는가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벨아미》가 보여주는 세계는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평등이 자리 잡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권 계급이 교묘한 방식으로 그 지위를 유지하는 구조적 위선의 사회처럼 보인다. 오늘날 프랑스 역시 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 기회의 평등을 표방하지만, 실질적인 사회 이동성은 OECD 평균 이하를 보일만큼 개인의 속한 사회적 환경과 계층의 영향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엘리트를 재생산 구조가 특히 두드러지고 있는 요즘 출신 학교, 거주 지역, 언어 억양, 행동 방식 같은 비가시적 문화 코드는 여전히 프랑스 사회에서 강력한 구별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치 열심히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또 기회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주어지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더 이상 "귀족 vs 평민"이라는 단순한 구도가 아닌, 사회문화적 상징 자본을 둘러싼 구별과 배제의 체계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이 현대 프랑스 사회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추는 통찰의 도구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르주 뒤루아의 성공 신화를 통해, 개인이 속한 사회 구조와 그 안에서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연출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묻게 된다.
“나는 진짜 어디에 속해 있는가?”
“내가 가진 것은 실력인가, 연출된 이미지인가?”
그리고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세대 간 소득과 계층의 이동성은 선진국 중 중간 이하 수준으로 평가된다. OECD의 분석에 따르면 부모 소득의 약 52%가 자녀 세대 소득에 대물림되는 것으로 추정된다.(OECD 기준 세대 간 소득 탄력성 ~0.52) 이는 OECD 평균(약 0.38)에 비해 높은 값으로 다시 말해 부모의 소득 수준을 유지하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프랑스의 소득 계층 경직성이 상당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경직성은 지역별 격차에서도 보여진다. INSEE 연구에 따르면 일 드 프랑스(Île‑de‑France) 지역에서 성장한 자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향 소득 이동 가능성이 높았던 반면, 산업 불황이 심한 북부 오트드프랑스(Hauts-de-France) 출신의 경우 이동성이 유의미하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부모가 이민자 출신이거나 부모 세대에 타 지역으로의 지리적 이동 경험이 있는 경우 자녀의 사회적 상승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반면 부모가 블루칼라 육체노동직(ouvrier)이거나 한부모 가정에서 성장한 경우, 그리고 여성인 경우에는 상향 이동 확률이 유의하게 낮았다. 이는 거주 지역이나 가정 배경에 따라 사회이동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프랑스에서는 출신 계층과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세대 단절되지는 않고 일부 상향·하향 이동이 이루어지지만, 여전히 부모 배경이 자녀의 소득 수준을 상당 부분에 영향을 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지역·성별 등에 따른 편차도 크다.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교육 지원, 지역 발전 정책 등을 추진해 왔으나, 계층 이동성 정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북유럽 수준으로의 사회 이동성 제고가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프랑스의 교육 제도는 사회 계층이 세습되는 핵심 원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어릴 때부터 학교 경로가 가정 배경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고등교육 단계에서 상류층 자녀들이 엘리트 트랙을 독점하는 경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초등~중학교 단계까지는 비교적 고른 편이지만, 고등학교 진학 시점부터 계층별 분화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계 고등학교(대학 준비과정)에서는 상류층(카드르, cadre) 가정 자녀 비율이 높고, 직업/기술계 고교에는 노동자 계층(ouvrier) 자녀 비율이 크게 나타난다
실제로 일반계 고교 1~2학년의 학생 중 카드르 자녀 비율은 37.1%인 반면 노동자 자녀는 14.8%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대로 직업교육 트랙(CAP)에서는 노동자 가정 자녀 비중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중등교육 단계에서 이미 계층별 진로 경로가 크게 갈라짐을 보여준다.
더욱이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률 자체에서도 격차가 큰데, 2014~2015년 기준으로 18~23세 인구의 약 30%가 노동자 가정 출신이지만 대학생 중 노동자 자녀는 11%에 불과했다. 그만큼 노동자 계층 청년들이 고등교육으로 진출하는 비율이 인구 비중 대비 훨씬 낮다는 의미이다.
막대의 보라색은 해당 과정에 있는 학생 중 상류층(카드르) 가정 출신 비율이고, 청록색은 노동자 가정 출신 비율을 나타낸다. Collège(중학교) 단계까지는 양 계층 비율이 비슷하지만, 일반계 Lycée 및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노동자 자녀 비율(청록색)이 급감하고 상류층 자녀 비율(보라색)은 급증하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전체 대학생 중 노동자 가정 출신은 약 8.7%에 불과한 반면 상류층 자녀는 34.5%를 차지하고 있다. 그랑제콜 준비반(classes prépas)에서는 노동자 자녀 6.4% vs 상류층 자녀 53.7%, 최상위 엘리트 학교(Écoles normales supérieures)에서는 노동자 출신 2.0% vs 상류층 64.9%로 극단적인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엘리트 고등교육에서의 사회적 구성은 더욱 불평등하다. 프랑스의 최상위 명문대학 및 그랑제콜(Grandes Écoles) 학생들은 대부분 상류층 가정 출신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계층 자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그랑제콜 준비반(prep)에서 노동자 자녀 비율이 6~7% 수준으로 1990년대 이후 크게 변하지 않은 수치이다.
또한 한 조사에 따르면 교육계 최상층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ENS) 학생 중 노동자 가정 출신은 불과 2%이고 카드르 출신이 63~6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도 1950년대엔 그랑제콜 학생의 약 29%가 노동자·농민 등 대중출신이었지만, 1995년엔 9%로 감소했고, 현재까지도 노동자·사무직 하위층 가정 비율은 약 10% 내외에 머무르고 있다.
이렇듯 엘리트 교육 코스에 진입하는 문 자체가 출신 배경에 따라 크게 다르기 때문에 프랑스 교육은 계층 재생산 메커니즘으로 자주 언급된다.
교육 성과 격차도 계층에 따라 뚜렷하다. 고교 졸업(바칼로레아) 및 대학 학위 취득률에서 상류층 자녀가 훨씬 높다. 예를 들어 한 연구는 카드르(상위층 전문직) 가정의 자녀 중 55%가 석사 이상 학위(Bac+5)를 취득한 반면, 사무·판매직(직업중간층) 자녀는 23%, 노동자 계층 자녀는 13%만이 Bac+5를 취득했다고 보고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노동자 가정 자녀의 석사 취득률 11%인데 반해, 상류층 자녀의 석사 취득률 50%+로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통계는 대학원 수준까지 진학하는 인구의 출신성분이 매우 편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부분적으로 앞서 본 초중등 단계의 교육경로 분기 영향인데, 실제 중학교 졸업 시점에 노동자 자녀의 59%가 직업교육 트랙으로 배정되는 반면 카드르 자녀의 84%는 일반계 고교로 진학하는 현실이 존재한다.
물론 교육 분야의 평등화 노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와 일부 명문학교들은 기회균등 프로그램으로서 Cordées de la réussite나 차상위계층 대상 특별전형 등을 도입하여 그랑제콜의 사회적 다양성을 높이려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공신력 있는 평가에 따르면 이러한 조치들은 전반적 통계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주로 홍보 효과에 그쳤다는 지적이 있다.
종합하면, 프랑스 교육 시스템은 명목상 능력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출신 배경에 따른 선발과 여과 작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계층 간 교육격차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공고히 한다고 해석한다. 정책적 시사점으로는 유아기부터 교육 불평등을 보완하고, 명문 고교·대학의 사회적 믹스 정책을 강화하며, 낮은 계층 출신 학생의 교육 역량을 끌어올리는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된다. 프랑스 사회 내부에서도 “능력과 노력이 아니라 태생이 성공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는 만큼,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 통로를 보다 공정하게 만드는 개혁이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에 따르면 프랑스 사회에서는 문화자본(문화적 취향, 언어습관, 예술소비 양식 등)의 차이가 계층 간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류층이 보유한 언어, 태도, 취향이 정통 문화로 간주되고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 대중계층의 문화양식은 낮은 가치로 취급되며 사회적 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학력 상류층은 고전음악, 문학, 미술관 방문 등 이른바 고급문화(highbrow culture) 소비를 즐기는 반면, 노동계층은 대중음악, TV 오락 등 대중문화(mass culture)를 선호하는 경향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계층별 문화취향의 차이가 단순 기호가 아니라 계층 구조의 상징적 재현이며, 상류층의 고급문화 취향은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노동계층의 대중문화 취향은 정당하지 않은 취향으로 낮게 평가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프랑스인의 문화생활 참여를 조사한 통계들을 보면 교육 수준·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공연·전시 관람, 독서 등 문화활동 참여율이 훨씬 높고, 낮은 계층일수록 그런 활동과 거리가 먼 모습이 확인된다. 2022년 EU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문화 활동 참여율이 저학력층보다 40% 포인트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극단적인 분석에 따르면 유럽 다수 국가에서 상하위 소득집단 간 문화행사 참여율이 2배 이상 차이 난다는 보고도 있다.
결국 어떤 문화를 소비하는지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서로 다른 계층 간에는 문화 취향의 차이가 교류와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와 억양은 프랑스에서 중요한 문화자본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어 표준 억양을 구사하는 파리지앵 상류층에 비해, 지방 출신의 강한 지역 악센트는 종종 낮은 교육·지위를 연상시키는 편견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억양에 따른 차별(글로또포비, glottophobie)이 프랑스 사회 문제로 대두되어, 2020년 말 프랑스 의회는 억양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는 출신 지역이나 계층에 따른 말투 차별을 공식적으로 차별행위로 규정한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된다. 배경에는 유명한 사건들이 있었다. 2018년 좌파 정치인 장뤽 멜랑숑이 국회 기자회견에서 남부 출신 기자의 투루즈 억양을 공개적으로 조롱한 일이 발생했는데, 그 영상이 전국에 방송되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어로 질문할 사람 없나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라고 비웃은 그의 발언은 공분을 샀고, 정치권에서도 억양에 대한 깊은 멸시라는 비판 성명이 나왔다.
한 설문조사에서는 프랑스인의 16%가 억양 때문에 진지하게 직업상 불이익을 받았거나 조롱당한 경험이 있다고 믿는다는 결과도 있었다(Ifop, 2020). 학계 연구에서도 언어학자 필립 블랑셰 등은 프랑스어 내 다양한 억양과 방언이 존재함에도 표준어 이외를 열등하게 보는 풍토를 지적하며, 실제 언어 차별을 겪은 사람들이 자기 검열이나 위축을 경험하는 경우가 30% 이상이라는 보고를 내놓았다. 다행히 현재 이러한 억양에 따른 차별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뤄져, 지역 방언과 억양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담론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뿌리내린 언어에 따른 계층 편견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프랑스 사회에서는 취향과 사교 양식도 계층을 구분 짓는 경계선으로 작용한다. 부르디외의 고전 연구 La Distinction(1979) 이후 현대에도 여러 실증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유머 선호도 역시 계층별 차이를 보이는데, 2022년 한 연구는 코미디 TV 시리즈에 대한 호불호를 통해 젊은 층의 계층적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상류층 교양 청년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들이 어떤 코미디를 '저속하다'라고 싫어하거나 '지적이다'라고 선호하는지에 따라 본인의 사회적 위치와 지향을 나타내는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X같은 싼티나는 드라마는 안 봐”와 같은 말로 자신을 특정 취향과 선을 긋고, “난 Y 같은 블랙코미디를 즐길 정도의 센스는 있어”라는 식으로 본인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상류층 청년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과 가치를 서로 확인하고 공유하는 반면, 그들이 배척하는 유머코드나 프로그램은 흔히 노동계층·저학력층이 좋아하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렇듯 여가생활에서조차 계층에 따른 취향의 경계가 그어져 있고,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상대방의 취향을 이해하거나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 문화적 격차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