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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날에는 끝내주고, 나쁜날에는 훨씬 더 끝내주는 도시

《A Moveable Feast》 by E. Hemingway

by 프렌치 북스토어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것이다.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 어니스트 헤밍웨이 -



1920년대의 파리, 그중에서도 라탱 지구는 자유와 예술의 심장이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에서부터 시작된 바람에는 언제나 잉크 냄새가 섞여 있었고, 카페의 창문 너머로는 단어들이 끓어오르듯 흘러넘쳤다. 아직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 아직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시인들, 그리고 빈 잔을 마주하고 논쟁하던 철학도들도 모두 하나의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헤밍웨이도 이들과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글을 썼다. 그의 문장은 길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정확했다. 광장의 소음과 카페의 침묵, 강변의 잔잔함과 출판사의 망설임까지 짧고 단단한 문장으로 붙잡아 냈다. 그렇게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는 시작되었다.


그에게 파리 6구의 오래된 카페는 도서관이었다. 사무실이었으고, 또 자신을 증명해내야 했던 무대였다. 노트와 낡은 연필 한 자루, 그리고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이 늘 그와 함께였다.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창가에 앉은 그에게 바람은 정오의 냄새를 실어왔다. 뜨겁게 볶은 커피 냄새, 막 구운 바게트의 구수한 향은 언제나 그를 자극했다.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웃음은 있었고, 또 때로는 외로워했다.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문장을 써 내려갔다. 그의 문장은 장식을 싫어했다. 불필요한 수사는 굶주린 작가에게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실만을 썼다. 거리의 소음까지도, 눈앞의 벽돌 하나까지도 모두 정직하게 받아 적었다.



파리는 좋은 날에는 끝내주고,
나쁜 날에는 훨씬 더 끝내주지!



자신을 의심하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파리는 말 그대로 끝내주는 장소였다.


카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라탱 지구의 심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생 미셸 광장에 있는 분수대 아래에는 물방울이 튀어 오르고, 아직 수염이 다 자라지 않은 학생들이 구겨진 책을 가방에 찔러 넣은 채 시간을 죽이고 있다.


헤밍웨이는 그들을 자주 지나쳤다. 하지만 말을 걸진 않았다. 다만 들을 뿐이었다. 그 젊음이 흘려보내는 말들과 모순, 열정, 좌절과 기쁨이 섞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광장은 작지만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었다. 말다툼, 웃음, 시위의 예고, 그리고 어떤 날은 키스까지 한 장소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나눈 입맞춤은 대부분 철학적이었다. 사랑과 혁명, 그 둘을 구분하지 않는 감정이 이 작은 구역을 뜨겁게 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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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공기에는 갓 인쇄된 책의 잉크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세느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학생들의 외투를 흔들었고, 그 위로 철학과 문학이 실려 날아갔다. 이곳의 열기가 책이나 정치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살아 있다는 감각, 자신의 말과 몸이 동시에 존재하는 확신이 생 미셸 광장을 하나의 무대처럼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가 묵묵히 앉아 바라보던 광장 중앙에는 미카엘 대천사의 동상이 햇빛을 받고 서 있었다. 마치 하늘과 땅 사이의 경계를 지키는 것처럼 유난히 빛났다. 하지만 정작 그 아래에서는 경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언어, 신념, 국적, 나이, 이 모든 것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파리는 완전한 축제를 열었다.


시간은 흘렀고, 광장은 변했다. 그가 자주 찾던 카페의 의자는 조금 더 낡았다. 커피값은 이제 당시의 일주일 식비보다 비싸졌고, 그가 걸었던 거리엔 이제 관광객과 스마트폰이, 그가 바라보았던 창가에는 다른 언어가, 그와는 다른 스타일의 젊은 작가들이 앉아 있다. 하지만 그곳엔 여전히 무언가를 쓰고 싶은 열정은 그대로다.


이제는 라탱 지구의 좁은 골목 어귀에서 당신이 마주칠 수 있는 것은 무명의 낙서, 작은 서점, 혹은 사라져 가는 햇살 속의 조용한 테라스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풍경들 속엔 헤밍웨이가 남긴 숨결이 살아 있다.


그저 한 도시를 사랑한 사람이 아닌, 한 인간의 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그 과정 전체를 증언한 작가로 그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파리는 끝나지 않는다. 그가 사랑했고, 우리가 읽었으며, 지금도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는 파리는 계속된다.








파리의 5구와 6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라탱지구(Le Quartier Latin)는 중세 시절 이 지역의 학교들에서 라틴어로 강의를 했던 전통에서 유래했다. 12세기 소르본 대학(Université de la Sorbonne)이 세워지고 나서, 이 지역은 오랫동안 지성과 학문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다.


라탱지구의 거리에는 여전히 오래된 서점과 고서 판매점, 철학 책을 파는 작고 어두운 서점들이 늘어서 있다. 거리에는 카페의 테라스가 펼쳐져 있고, 계절에 따라 광장 한가운데에는 거리 음악가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소르본 대학(La Sorbonne), 생 미셸 광장(Place Saint-Michel),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Shakespeare and Company), 뤽상부르 공원(Jardin du Luxembourg) 등이 위치하고 있어 학생들과 시민들이 산책하고 독서하고 일상 속의 사색 공간으로도 자주 찾는 곳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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