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카페, 그리고 도서관

제3의 공간으로써의 도서관

by 프렌치 북스토어

요즘 프랑스의 도서관에서는 마치 동네 사랑방이나 카페에 온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은 바닥에 앉아 그림책을 보고, 거의 누워있는 듯 앉아서 노트북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과제를 하거나 토론을 위한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기도 하고, 설치되어 있는 PC로 신문을 읽거나 체스를 두는 어르신들도 있다.


이런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의 도서관을 제3의 공간(third place)이라는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미국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에 의해서 처음 정의된 이 개념은 공동체 생활을 만들고 유지하는 중립적인 사교 공간으로 집(혹은 가정), 직장(또는 학교)에 이어 그 세 번째 공간을 정의했다.


올든버그는 제3의 공간을 아늑한 동네 카페나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펍(pub) 같이 열린 공간을 의미했다. 누구나 갈 수 있고, 휴식을 취하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정의했다. 프랑스에서는 이 개념이 티에르-리외(tiers-lieu) 혹은 트와지엠 리외(troisième lieu)로 번역되어 확산되기 시작했다.


공공도서관이 제3의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09년 프랑스 국립도서관학교(ENSSIB)의 마틸드 세르베(Mathilde Servet)는 이 개념을 처음으로 도서관에 적용한 새로운 도서관 모델을 소개했다. 그녀는 유럽 북부의 혁신적인 도서관들을 예로 들면서,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대여해 주는 기관 이상으로 기능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도서관의 새로운 역할로 지역 공동체의 사랑방과 같은 공간을 제공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후 프랑스 도서관계에선 트와지엠 리외(troisième lieu)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대에 들어 도서관을 새롭게 탈바꿈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잘 쉬고,
열심히 일하고,
도서관에 가라!


실제로 2018년 프랑스 문화부가 발간한 이릭 오르세나(Erik Orsenna) 보고서에는 '첫 번째 공간은 집, 두 번째 공간에 일터, 그리고 세 번째 공간으로 다채롭고 따뜻한 도서관'이라고 명시했다. 잘 쉬고, 열심히 일하고, 도서관에 가라는 문구로 도서관을 제3의 공간으로 공식적으로 정의했다.


이러한 변화는 집-일터-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삶의 균형을 새롭게 그려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문장 안에는 도서관이 현대인의 일상 속 휴게실이자 삶의 한 축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도서관이 제3의 공간으로 떠오른 것일까?


프랑스 공공도서관은 전국에 약 1만 6천여 개가 분포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집에서 20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공공시설인 것이다. 게다가 무료로 개방 운영되고, 운영 시간도 야간과 주말까지 확대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찾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장소로, 마치 카페나 펍처럼 언제나 찾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덕분에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중립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높은 접근성과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더불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제3의 공간 개념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비블리오테크(bibliothèque)라는 단어와 함께, 현대적 개념인 메디아테크(médiathèque)라고 불리면서 멀티미디어, 예술, 모임 공간을 함께 제공하는 지역 문화센터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게 됐다.



▍도서관의 공간 혁신


제3의 장소로서의 도서관은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다. 과거에는 조용히 책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열람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늑한 소파와 쿠션, 온화한 조명, 녹색 식물들이 배치되고, 가구와 인테리어 또한 아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실제로 파리의 많은 도서관 입구에는 두 번째 거실에 온 것처럼 느끼도록, 작은 카페 코너나 휴식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정숙해야 한다는 느낌보다는 편하게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먼저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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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이 프랑스 도서관은 어린아이부터 학생, 직장인, 구직자, 노숙자, 노년층, 이민자까지 다양한 세대와 계층을 위한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특히 아동들을 위한 코너에는 직접 책을 고를 수 있도록 낮은 책장이 배치되어 있고, 청소년을 위한 공간에는 빈백(bean bag)에 눕거나 게임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이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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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인상적인 점은 일부 도서관에는 수만 권의 만화책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보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 대화와 토론, 휴식을 위한 공간까지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마치 그들만을 위한 아지트 같이 운영되고 있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최근에는 더욱 다양해진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스터디룸, 커뮤니티 모임실, 창작과 협업 공간 등을 속속 만들고 있는 추세이다. 렌(Rennes)시의 샹 리브르(Les Champs Libres)라는 신개념 도서관에는 4C 공간이라는 특별한 커뮤니티룸을 운영 중이다. 4C는 창의성(Créativité), 협업(Collaboration), 지식(Connaissances), 시민의식(Citoyenneté)을 의미하는데, 지역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다양한 주제의 모임들이 운영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로 전시, 영화 상영, 연극 공연, 작가와의 만남 행사, 독서 모임, 게임 대회 같은 문화 프로그램들이 계속해서 운영된다는 점이다. 학술 워크숍에서부터, 지역민들을 위한 강연, 문화 행사와 지역 축제까지 그 대상과 범위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일부 지방 도서관은 인생학교 프로젝트를 열어, 퇴직한 노인들의 풍부한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고, 가령 정원 가꾸기나 손뜨개 교실 같은 작은 클래스를 운영하기도 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을 위해 이력서 작성법, 면접 연습 세션을 개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변화의 수혜를 가장 크게 받는 곳은 비교적 문화적 접근성이 떨어진 지역이다. 프랑스의 옛 탄광 도시였던 그르네이(Grenay)에서는 에스타미넷(L’Estaminet)이라는 도서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처음부터 제3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이 공간은 1300㎡ 규모의 복합 문화커뮤니티 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도서관에는 책과 잡지, DVD와 보드게임 등 2만여 점의 자료를 구비한 일반 자료실과 더불어 어린 자녀를 둔 부모를 위한 육아 상담실, 청소년을 위한 지역 센터, 직업 정보센터와 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공연장, 시민들을 위한 카페 겸 사교 공간을 모두 제공하고 있다. 더욱이 밴드 음악을 연습할 수 있는 녹음/연습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고, 팟캐스트를 제작할 수 있는 장비들까지 보유하고 있다.


또,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해안 마을 랑데다(Landéda)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기존에 있던 오래되고 낡은 도서관 건물을 장난감과 도서관이 결합된 모습으로 리모델링했는데, 모두가 모여 보드게임을 하고, 장난감을 빌려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면서 마을 주민들의 큰 호응을 불러내기도 했다.



▍대도시와 시골,

▍도서관이 갖는 서로 다른 의미


현재 프랑스에는 인구 2만 명 이상의 지역에는 제3의 공간으로써의 미디아테크가 거의 설치되어 있을 만큼 공공도서관망이 촘촘하게 발달해 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 지역 규모에 따라 도서관의 모습과 역할은 조금씩 다르게 정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도시의 공공도서관은 흔히 그 도시의 대표 문화 랜드마크가 될 정도로 규모와 상징성을 중요시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 있는 공공정보도서관(BPI)은 하루에도 수천 명이 드나드는 초대형 도서관으로, 전 세계 배낭여행자부터 파리의 노숙인까지 모두를 위한 포용의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실직자나 거리의 노숙자들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자료를 열람하고, 내부의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세르주 포강(Serge Paugam)은 BPI를 낙인으로부터 벗어나는 피난처 같은 공간이라고 정의했을 만큼,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취약한 환경에 놓인 이들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편안함과 존중감을 느끼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BPI에서는 구직자를 위한 행사가 자주 열린다. 취업 지원 워크숍이 열리기도 한고, 구직자들을 위해 자신감 회복 수업, 모의 면접 강의, 자영업 창업 세미나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정부 구직 기관(Pôle Emploi)과 함께 협력해서 제공하고 있다.


신기한 점은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취업 행사가 정부 기관에서 진행하는 행사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직 행사 자체가 도서관이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에서, 편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높은 참여율과 긍정적인 호응을 보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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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지방의 중소도시나 농촌 마을의 도서관들은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밀착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함께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농어촌 지역의 소규모 지자체에서는 도서관이 마을의 유일한 문화 공간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을 위한 복합 행정 기관의 역할을 겸하기도 한다.


아르덴(Ardennes)과 마른(Marne) 지역의 여러 마을들이 도서관에서는 다른 공공서비스를 결합하는 원스톱 마을센터를 운영하면서 관공서 민원 데스크, 우체국 업무 창구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종합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만들기도 했다.


도서관은 이제 더 이상 조용히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프랑스 곳곳의 도서관들은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찾고 머무르고 섞이는 공간으로 이제는 카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도서관은 여전히 조용히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사람들이 모이고, 이곳에서 배우고, 연결되고, 또 성장한다.


이제는 도서관에 기대야 할 것은 단순한 정보나 서비스만이 아닐 것이다. 지친 일상에서 쉼표를 찾을 수 있는 곳, 다시 돌아갈 힘을 충전하는 만인의 케렌시아(Querencia)가 될지도 모른다.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꿈을 꾸게 하는 공간, 그것이 진짜 도서관이 꿈꾸는 모습이 아닐까?




※ 이미지 정보

1, 2. 프랑스 공공 도서관의 아이들을 위한 코너

3, 4, 5. 트온빌(Thionville)에 위치한 공공 도서관

6. 도서관에 위치한 우체국 업무 창구, 마른의 샤롱(Châl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