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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하 Oct 24. 2021

언어의 자의성

1-4 살아있는 외국어 공부, 세상을 인식하는 틀로서의 언어

언어는 자의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과’와 ‘apple’은 발음이나 모양에서 실제적으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특정 문화권에서 같은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언어가 가진 자의성입니다. 언어는 그 단어 자체가 그 자체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소리가 자의적으로 어떤 사물, 개념, 동작, 느낌, 표현 등과 엮여진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만들어서 붙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아이를 보면 그 이름을 연관해서 떠올립니다. 이것이 언어와 감각의 연결입니다.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감각과 자의적인 단어를 새롭게 연결해야합니다. 그래야 꽃을 보고 “아 예쁘다. 예쁘다가 영어로는 뭐였지? pretty?”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떤 특정한 그 뭉클한 감정이 떠올랐을 때 예쁘다와 더불어서 “pretty”라는 느낌이 내 안에 즉각적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것이 내 안에 언어의 어감을 형성해가는 과정입니다.


이 어감의 형성은 모국어 학습에 있어서도, 외국어 학습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어떤 외국어도 모국어와 1:1로 치환되지 않습니다. 영어의 pretty, beautiful이 다르고 일본어의 かわいい와綺麗、美しい가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어의 ‘예쁘다’와 ‘아름답다’와도 또 다릅니다. 이 어감은 그 문화권 속에서 각각의 단어가 어떤 상황과 감정일 때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지를 여러 번 경험하고 익혀가면서 서서히 형성하고 익혀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어 학습을 하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 외국어 단어가 떠올랐는데 그에 맞는 한국어 번역을 찾지 못해서 애를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특정한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가 외국어에는 명사나 단어로 존재하는데 한국어로는 존재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감각들과 단어들, 표현들을 연관시키면서 언어를 학습하다보면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 새롭게 짜여집니다. 언어를 학습하는 것은 자신 안에 이 세상을 인식하는 틀을 새롭게 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외국어가 수준에 오른다면, 제 안의 감각으로는 몸 안의 어떤 스위치로 한국어를 쓸 때는 한국어 스위치를 켜서 발화하고 일본어를 쓸 때는 일본어 스위치를 켜서 발화하는 느낌의 틀의 전환도 가능하게 됩니다. 물론 이 감각들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 표현이 섞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와 한국어를 보면, 세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한국어는 복수를 반드시 드러내서 표현하는 경우가 드물어도 우리가 맥락상 복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의 경우에는 말하는 대상이 복수인지 단수인지를 드러내서 표현합니다. 성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어는 제 3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드러내지 않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 그녀 같은 대명사가 문학 작품 등이 아니고서는 일상 회화에서 널리 쓰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어는 일부 LGBTQI에서는 자신을 어떤 대명사로 지칭해주길 바라는지 표명하는 것이 중요한 자기소개의 일부분일 만큼 he, she 혹은 they(복수의 they가 아니라 단수대명사로 자신을 they로 불러주길 바랄 때도 있습니다.)를 사용하지 않은 채 제 3자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언어들 하나하나의 차이를 느끼다 보면 각 언어권이 세상을 어떻게 들여다보고 있는지를 그와 함께 엿보거나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와 문화는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언어는 그 문화권의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 세상을 보는 틀, 표현하는 방식, 전달하는 방식 등을 총괄하기 때문입니다. 언어적으로 어떤 특정 표현이 존재 하는가 아닌가의 유무로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은 달라집니다. 북극에 사는 사람들은 눈의 색이기도 한 하얀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훨씬 다채롭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그들 문화권 안에서 세상을 인지하고 감각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세상은 단편적인 사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물인 명사들은 사실 1:1번역 학습이나 명사 학습이 가능합니다. 사물은 그래도 존재하는 어떤 것을 1:1로 지칭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명사로 들어가도 “의자”라는 명사만 놓고 봤을 때 우리는 무수한 형태의 “의자”를 모두 “의자”로 지칭합니다. “의자”라는 명사가 단순히 어떤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평평하고 사람이 앉는 용도로 사용되는 무엇이라는 개념과 우리 안에서 묶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학습은 나아가면 이러한 개념의 학습과 그 개념과 단어의 연관 짓기입니다.




세상은 완전히 칼로 자른 듯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 드뭅니다. 좀 더 철학적으로 들어가면 내가 “나”라고 인지하는 이 육체도, 무수한 세포, 기관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포는 계속 죽고 계속 생성됩니다. 내가 나라고 인식했던 나를 이루었던 요소는 며칠 후에는 다른 것으로 바뀌어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인식 자체도 개념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사물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물 안의 무수한 원자들은 가만히 정지하서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화학반응, 부식과 마모도 일어납니다. 고정 불변의 1:1로 치환되는 무엇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일 뿐일 수 있습니다.


빛이 색을 반사하는 방식, 그리고 그 빛이 망막을 통해 색이라는 파동으로 인식되는 방식도 그렇습니다. 빛은 나뉘지 않는 스펙트럼의 무수한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서로 이해하기 쉽고 인식하기 쉽고 개념이 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분류를 합니다. 무지개의 빨주노초파남보가 그렇습니다. 실제의 무지개는 7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빛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각 기관 자체가 우리가 파동과 에너지로 이루어진 세계를 시각, 촉각, 청각, 미각, 후각 등의 감각으로 치환해서 인식하는 도구이고 이러한 치환된 감각은 다시 언어라는 틀 속에서 명명이 되고 새롭게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개념들도 그렇습니다. 개념은 우리가 사고를 확장하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고 형성해가는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고를 전달하고 또 전달받으면서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게 되고 내가 느끼고 전달하고 바라보고 있는 이것을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언어라는 도구의 힘을 빌립니다. 


시간이라는 개념도 칼을 자른 듯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1시, 2시, 3시 같은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1초와 1초 사이에는 인식할 수 없는 무수한 순간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 등을 고려해서 우리가 인식하고 생활에 이용하기 좋은 범위 안에서 약속을 정하고 분류를 한 것입니다.


어떤 개념들은 세계적으로 통일하는 약속을 해서 동일한 개념을 사용하거나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로 그 개념이 널리 알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문화권 안에서, 일상생활 안에서 특정한 감정의 표현, 상황의 표현, 그리고 그 방식과 그에 대한 사회적 반응의 약속 등까지도 문화권 별로 다양합니다. 이것이 언어 입니다. 언어는 가장 일상적인 영역부터 철학적인 영역까지 밀접하게 연관이 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언어 학습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내가 새롭게 세상을 인지하는 틀, 렌즈를 하나 더 익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내가 인식하는 세상 그 자체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통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인식하는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접하고 이해하는 경험은 신선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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