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살아있는 외국어 공부, 언어 학습의 재료 모으기
언어의 자의성과 감각적인 연결의 중요성을 인식한 상태에서의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매체를 통한 섀도잉 학습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내가 특정한 감정에 처했을 때,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개념이나 마음, 생각을 표현하고 싶을 때, 그것을 목표 외국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내가 나 스스로 연습하고 표현해보는 훈련과정을 쌓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문장 별로 끊어서 섀도잉 학습을 도와주는 어플리케이션 등도 많아서 활용하기도 좋습니다. 사용된 단어의 뜻을 바로 찾아볼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들도 있습니다.
단순히 문장 안에 쓰인 단어의 뜻을 알고, 그 단어를 들으면 그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마치 흰 바탕에 검게 쓰여 있는 것은 글씨인데 이런 모양의 글씨는 이런 의미라더라 하고 해석하는 독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문장을 들었을 때 그 문장이 번역되어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각으로서, 개념으로서 들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언어로서 그 외국어를 익히는 출발선에 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목표 언어의 네이티브의 발음을 많이 듣는 환경이 아니고서는 생기기 어렵습니다. 저런 상황, 저런 감정, 저런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 할 때 이런 어조, 이런 말투, 이런 표현을 사용해서 이렇게 말을 하는구나 하는 것에 끊임없는 노출을 통해 익숙해질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런 방식으로 말을 해보는 것을 연습 하는 것이 섀도잉입니다. 그래서 연극 화법적인 훈련, 다시 말하면 “연기하지 않고 정말로 그 상황에 처해 진심으로 대사를 하는” 훈련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훈련은 자신의 감각과 내가 내뱉는 말을 직접적으로 연결해주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렇게까지 훈련하지 않더라도 목표 외국어의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보는 것은 언어 학습에 도움이 됩니다. 각각의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성격, 감정에 따라서 어떤 식으로 대사가 발화되는지에 대한 좀 더 자연스럽고 살아있는 외국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제된 녹음실에서 정제된 문장이 녹음된 어학 학습테이프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언어는 말이고 글에는 말의 정보를 다 담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에는 단순히 발음 방법이아니라 인토네이션, 고저, 발화자의 감정,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 성격 등 촘촘히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는 녹음실에서 정제된 어학 학습테이프에는 많이 담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러한 모든 정보를 총괄해서 나도 담아내고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언어로서 그 외국어를 익히는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상냥하게 말하고 싶은가, 당차게 말하고 싶은가, 좀 더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은가, 좀 더 강하게 말하고 싶은가, 어떤 감정을 담아서 말하고 싶은가. 혹은 내가 듣는 말은 어떤 느낌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들은 직접적으로 그 발화의 음성, 진동, 에너지를 느끼며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글에는 이러한 정보가 담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발화를 통한 정보들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고 있다면 글을 통해서도 그 음성을 마음속으로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글쓴이의 어조나 태도, 주장을 느끼고 읽어내는 것이 훨씬 수월합니다. 이것은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해석”해내는 “독해”가 아니라 글을 음성으로 들어내는 듣기이자 읽기입니다.
읽기는 결코 듣기, 말하기 영역과 따로 분리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따로 분리해서 학습하는 순간 언어로서의 가치를 많이 상실하게 됩니다. 글에도 글쓴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 어조가 글 자체에는 직접적으로 적히지 않은 포괄적인 음성정보로서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음성정보에 대한 학습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러한 읽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언어 공부의 순서에서 듣기 -> 말하기 -> 읽기 -> 쓰기 순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목표 외국어의 네이티브들이 특정 상황을 표현하고 소통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쓰고 어떤 표현을 어떤 방식으로 엮어 쓰는가를 학습하지 않고 내가 바로 말하기를 시도한다면 내가 아는 단어들을 외국어로 번역한 콩글리시 같은 발화가 되기 쉽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는 틀을 배우려면 일단 그 틀이 어떻게 만들어져있는지 자체를 익혀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억지로 틀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 외국어 네이티브의 발화를 많이 듣고 이해하고 노출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표현을 하고자 하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재료가 늘게 됩니다. 언어는 창조의 영역이 아니라 재료를 이용하는 영역에 가깝습니다. 내가 ‘사과’를 혼자 ‘과사’로 부르기로 정해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해서 아무도 내가 말하는 ‘과사’를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저기 있는 빨갛고 살짝 단단하고 껍질은 이런 촉감을 가지고 있고 껍질은 이정도의 굵기이며 속에는 이정도의 단단함을 가진 노란 빛깔이 들어있는 저 과일을 “사과”라는 이름으로 부르는구나 하는 것을 먼저 익히고 내가 그것을 부르고 싶을 때 내가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과”라고 익힌 그것을 가져다 써야 합니다. 이것이 언어 학습입니다. 그러려면 세상의 재료 자체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재료가 쌓여야 나도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바를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외국어 학습도 마찬가지 입니다. 외국인 네이티브가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말을 하는가를 많이 듣고, 익숙해져가는 과정 속에서 나도 같은 상황에서 그 재료를 사용해서 나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안에 있는 한국어를 사전이나 번역기로 번역해서 외국어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 틀을 익히고 그 모은 재료로 나도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재료를 모으고 그 다음에는 내가 그 재료를 이용해서 발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어 학습의 순서가 말하기->듣기나 쓰기->읽기가 아니라 듣기->말하기, 읽기->쓰기가 되어야 합니다. 일단 이 언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그 재료 자체를 파악하고 알고 익혀야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즉 소통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말하기와 쓰기가 조금씩 더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네이티브가 쓰는 맥락과 유사하면 유사할수록 네이티브에게 더 알아듣기 편한 외국어가 됩니다. 그리고 나도 네이티브의 언어를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