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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Oct 16. 2024

회피형 나르시시스트 (9) 긴긴 밤

소설, 이별의 불가능성

그 밤은 길었다. 그는 전 여자친구 릴리를 떠올리며 밤새 울었고, 나는 그런 그를 달래주었다. 내 마음은 이미 접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마음이 그냥 닫혀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의 마음이 이미 전 여자친구로 가득했었던 것이라면 그래서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문제였다. 마음이 그냥 닫힌 그와 사귀는 것과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있는 그와 사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나는 그가 전 여자친구 릴리와 그가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헤어졌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현재는 그의 그러한 생각을 바꾸는 중이라고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그가 지금은 아이를 낳는 것에 예전보다 거부감이 없다면 전 여자친구의 갈등 요소도 없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냥 그녀에게 돌아가면 되지 않나 싶었다. 그것이 그를 위해 좋을 것만 같았다. 나는 결국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려고 이 길을 왔던 것인가를 생각하며, 그래도 그가 친구로서 나를 도와주었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지금 그 은혜를 값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와의 첫 만남부터 그는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감정적으로도 상황적으로도 혼란에 쌓여있을 때 그는 나를 도와주었다. 당시의 그의 친절은 큰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와 조금씩 친구가 되어갔다. 그는 나의 사고를 치고 다니는 장면들을 목격하고 그러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또 넘어가주기도 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삶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그는 처음부터 나를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그 굴레 속에서 내가 가장 헤매면서 그에게 딱 한번 메일을 적었을 때, 그는 일주일 후에 "너는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답장을 주었다. 그 후 딱히 그가 나를 더 많이 도와주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것조차 아니었지만 그 당시 그의 메일에 위로를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받았던 도움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그냥 남자친구였다면 정말로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그런 친구였던 그였기에, 전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밤새 우는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 내 안에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여자친구로서 그를 찾아왔던 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나 스스로도 간과하고 있었다. 그때 그에게 화를 내고 어떻게 나를 불러놓고 너는 이럴 수 있냐고 따졌으면 더 나았을까? 그 순간에 그냥 짐을 싸서 나가버렸으면 더 나았을까. 전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밤새 울던 그도, 그런 그를 달래던 나도, 이미 평범한 남녀 사이는 아니었다. 


그를 달래다가 그의 안에 그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닫혀 있던 그의 마음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느끼고 다시 울었다. 그가 아주 간헐적을 보여주었던 그 작은 친절, 그것이 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 여자친구로 가득한 그의 마음이 결국은 나를 돕는 것으로 이어졌었다면 나는 그러한 마음을 원망할 수조차 없었다.

내 앞에 이미지가 보였다. 그의 마음에 빛이 펼쳐지며 열렸다. 지금까지 닫혀있던 그의 마음이 연결되고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고, 그렇게 한 것도 내가 아니었다. 그것이 슬펐다. 내가 그에게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확인 받았던 그 순간이 너무나 많이 슬펐다. 그럼에도 그를 위해서 그의 마음을 보듬고 달래주며 있어줄 수밖에 없던 내가 슬펐다. 그렇게 하는 것 또한 나였다. 내가 가진, 사람의 영역을 벗어난 부분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그를 향한 큰 공간이 이미 있었다. 그 자체가 거짓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아래 저편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보듬고 그를 달래주고 있는 것도 나, 그리고 저 아래편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면서 심장에 무수한 칼이 꽃히고 있는 것도 나였다. 그를 안아주고 보듬어주면서, 사실은 그에게서 나온 뾰족뾰족한 칼에 무수히 찔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나는 안아주고 있었다. 내 눈에는 작은 소년이 보였다. 그의 상처받은 어린 영혼이었다. 그 작은 소년을 내 안의 큰 존재가 그저 감싸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안의 어린 소녀는? 그녀의 상처는 어떻게 되었나? 그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작은 소년을 달래주느라고 그만 방치하고 말았다. 그 아이가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채, 나는 그 밤을 그를 달래면서 보냈다. 그는 이 세상 소리가 아닌 것같은 절규와 함께 크게 울었다. 그리고 이내 진정되며 릴리를 생각하는 듯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내 눈에 그는 비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옆에 있었지만 없었다. 내 마음을, 내 마음의 상처를 달래줄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그저 소년처럼 자기의 추억과 기억 속에 침잠되어갔고 자신의 행동이 나에게 입히고 있을지 모르는 상처에 대해서는 자각도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를 위한 시간이었고, 나는 그 시간의 들러리였다. 그를 위한 밤이었다. 


전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미안함도, 그러면서 나의 존재를 부정하며 대화 조차 거부했던 것에 대한 인식도, 결국 전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크게 울면서 밤새 보낸 것에 대한 현재 연애를 하려고 하는 상대에 대한 고려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이나 나의 느낌 자체는 그 안에서 처음부터 부재했다. 언제나 그랬다. 그는 자신이 느끼고 평가하는 나에 대해서만 말할 뿐 그로 인해 내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상처를 받고 어떤 감정을 느낄지하는 그 자체의 고려가 결여되어 있었다. 내가 그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고 그것이 좋은가 불쾌한가 그것만이 그에게 중요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할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그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내가 어떨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 여자친구는 자신에게 천사였다며 그는 밤새 울었다. 나도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녀는 너에게 천사였을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들은 그는 크게 울었다. 천사를 잃은 회한과 서러움이 그의 온몸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는 밤새 울고 울고 또 울었다. 그의 앞에 있는 내가 그의 앞에서 투명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지조차 모르는 채 그는 그저 자신의 감정에만 휩싸여서 밤새 울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멀쩡했다. 내 안의 사람의 영역을 벗어난 부분이 그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며 한편으로는 내가 그렇게 사람의 영역을 벗어난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슬펐다. 나는 그에게 인간적으로 화를 내지도, 나를 봐달라고 소리치지도 못했다. 그저 그를 감싸주고 보듬어주고 그가 온전히 그 슬픔과 함께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주 오랜시간이 지나고서야 내 안 깊의 곳에 있는 소녀가 조금은 목소리를 냈다.  그의 울음이 진정되어 가자 내 안의 불안은 폭발했다. 나도 울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였다. 우리는 각자 잠을 잤는데, 나는 중간에 잠을 여러번 깼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 속에서 나는 네 세계 안에 있었어. 너는 큰 배 같은 것에 타고 있었어. 그 배는 커다란 창문이 여러개 있고 창문이 열려 있고 불이 밝혀져 있었어. 그런데 네 시각으로 그곳을 다시 보면 깜깜했어. 아무 불빛도 보이지 않았어. 그것이 네가 보는 세상이었어. 너를 위해 밝혀진 불도, 열린 창문도 많은데 네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 그가 말하는 배 안 이미지가 내 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내 안의 외침도 들렸다. "아무도 없어요? 여기는 너무 깜깜하고 어두워요." 그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적어도 내 삶의 위기가 닥쳤던 7년 전에도 선명하게 내 안에 있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 최근에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아직 내 안에 있었다. 그렇다. 내 안에는 어둠 속에 갇혀서 혼자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어둡고 캄캄하고 무서운 곳에 혼자 있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밖에는 너를 위한 창문도 불빛도 많았어. 나는 너를 향해서 활짝 웃으며 말했어. 내가 옆에 있다고. 그리고 저기 밖에도 많은 불빛들이 있다고 나는 너에게 그렇게 말했어." 방금 전까지 전 여자친구를 떠올리며 울던 그가 나에 관한 꿈을 꾸었다며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너무나 이상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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