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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Oct 17. 2024

회피형 나르시시스트 (10) 폭탄 선언

소설, 이별의 불가능성

다음날 아침, 내 기분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예정대로 다시 데이트를 계속했다. 이날은 주로 드라이브를 하며 먼 곳에 있는 산악지대를 가는 날이었다. 아침에 간단히 같이 도시락을 만들고 우리는 산길을 같이 차로 달렸다.

차 안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어느 순간 어제에 관한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가장 먼저 어제 내 안에 들었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그와 릴리가 다시 만나서 사귄다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릴리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몇년 전에 릴리와 재회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릴리가 이미 결혼했으며 자녀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더 놀라웠다. 릴리의 남편은 자신을 알고 있으며 그 남편이 자신을 위협으로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왜냐하면 릴리가 자신을 정말로 좋아하고 자신도 그렇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와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도 좋았고, 그는 그 이후로 그녀의 남편을 끼고 셋이서 그녀와 사귀면서 관계를 이어갈 수는 없을까를 혼자 상상하고 생각해봤다고 했다. 어제 일을 계기로 그녀에게 편지를 써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어찌보면 황당하기도 한 그 생각을 그저 그러냐고 듣고 있었다. 릴리와 제대로 맺어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내 안의 생각이 수정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말하는 그 방식은 아니었다.


그의 태도와 말투는 조금씩 달라져있었다. 어딘지 차갑고 시니컬하고 논리적이었던 그의 목소리에 상냥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어젯밤 그의 마음이 다시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스스로 그러한 그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한 그가 한층 더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친구로서 편히 여기던 어딘지 시니컬하면서 차갑던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따뜻한 그가 눈 앞에 있었는데 그 따뜻함조차 나로 인한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시니컬한 챈들러를 돌려줘!"라며 그에게 몇번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그 모든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재회한 순간부터 내가 모르던 소년 같은 모습을 보이던 그가 이제는 완전히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그래서 만나러 왔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그 모든 상황에 나는 너무나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어젯 밤에 그를 달랠 수 있었던 내 안의 사람의 영역을 넘어선 영역에 대해서 그에게 말했다. 얼마나 전달될지조차 몰랐지만 내 상황을 그에게 이해받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그의 과거 여자친구들과 그의 마음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하면서 데이트를 마쳤다. 


그의 집에 다시 도착하자 그는 다시한번 소리내서 크게 울었다. 아직은 남아있는 그의 슬픔에 그는 다시한번 울었고 나는 그를 안아주고 달래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기 때문에 나는 빨래를 하려고 내 옷들을 세탁기에 넣어둔 상태였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어. 너는 어쩌면 내 소중한 친구 중 하나야." 이상한 맥락이었다. 그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렇지만 너는 나에게 가족 같은 느낌이야. 너는 나한테 여동생이나 누나 같아. 그리고 어제 나는 다시 마음이 다시 연결되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사랑에 빠져보고 싶어. 설마 내가 너한테 사랑에 빠지라는건 아니겠지?"

그는 내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 안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판단이 섰다. 그래, 끝났구나. 그럼 떠나야지. 말을 다 마치고 그는 나한테 질문을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거기에 싸늘하게 "왜?"라고 덧붙였다. 관계를 끝내자고 한 것은 그였다. 나에게 헤어진 사람은 그걸로 끝인 인연이었고 그런 그에게 대꾸할 의무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말 이후에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그의 태도가 이상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었다. 시간이 새벽 2시였다. 그렇다. 그는 시간도 그 무엇도 나의 상황에 대한 그 어떤 고려도 배려도 없이 한밤중에 폭탄 선언을 한 것이다. 새벽 2시는 혼자 나가서 돌아다니기에 치안이 좋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새로 호텔이나 잘 곳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바로 그의 집을 떠나서 역에라도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첫차를 기다려서 바로 다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세탁기가 돌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입는 대부분의 옷이 세탁기 안에서 돌고 있었다. 나는 옷이 많지 않았고 그 많지 않은 옷을 가져왔던 터였다. 옷을 두고 가는 선택지가 내 안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때 옷을 두고 바로 떠났으면 어땠을까? 혹은 이때 세탁기가 돌고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적어도 그 공간을 나와서 밖으로 갔을 것이다. 물론 치안이 좋지 않은 밤에 사고를 당했을 위험도 있지만 그 길로 무사히 귀국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쉽사리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세탁기가 다 돌아도 건조기로 옷을 말리는 시간까지도 필요했다. 새벽 두시가 넘었고, 지쳐있었다. 일단 되는 대로 세탁물을 제외한 짐을 다 쌌다. 그는 여러번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내가 대꾸가 없는 것을 확인하며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당황이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면 그는 내 어떤 행동을 예상하고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내가 아 그러세요, 하고 그럼 우리 친구하자라고 할 줄 알았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그는 그의 마음에 대한 말만 했지 내 마음에 대한 이야기나 고려는 존재 하기는 했는가? 그의 일방성에 내가 할 말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는 돌아오지 않는 내 반응을 보며 여러번 혼자말을 반복하며 발을 굴렀다. "이거야? 겨우 이게 끝이야? 정말?"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 조금 내가 한 말을 후회해." 그러다가 다시 이내 말을 바꾸었다. "아니 후회하지 않아. 그래 이게 끝이라면 그래." 그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계속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근처에서 자려다가 결국은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방에서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내가 이대로 떠나도 그는 내가 왜 그렇게 떠났는지조차 모를 것처럼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적어도 이유라도 설명해줘야하나 싶었다. 그것은 나의 친절이었다.


그에게 차를 끓여달라고 하고 대화를 위해 앉았다. 나는 가만히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했다. 그의 이야기의 일방성, 그 이야기 속에 이미 내 마음이나 우리 관계에 대한 고려가 없었던 점 그 속에서 대체 왜 나에게 질문을 하려 하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리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비행기를 타고 왔는지 나의 심경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생각을 해보고 싶다고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그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한 말을 후회해. 주워담을 수 있다면 주워 담고 싶어.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결과도 받아들이겠어." 그러면서 동시에 말했다. "내가 너와 사귄다고 나에게 스스로 이야기했을때 나는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너와의 관계를 이전에 생각했을 때는 부정적인 의문이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순수한 물음표가 떠올라." 그렇게 말했다. 한참 부족했다. 확신도 아닌 물음표이다. 심지어 그의 말은 정말로 이전에는 나와 사귀고 있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더더욱 분명히 드러냈다. 어제 그의 폭탄 선언은 헤어지자는 말 조차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나를 만지고 섹스를 하려고 시도하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데이트를 다닌 것이 된다. 그와 사귀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던 3일간의 모든 일들은 그의 이 말들로 인해서 완전히 무너졌다. 그런데 나는 그를 떠나지 못했다. 


동시에 그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갑자기 나올 모든 말이 무서웠다. 그는 다시 섹스를 시도했다. 그러나 "너와 사귄다고 나에게 스스로 이야기했을때 나는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라고 말했던 그만큼 내 마음도 조금은 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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