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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Oct 19. 2024

회피형 나르시시스트 (12) 불확실성의 길목에서

소설, 이별의 불가능성

귀국 후 2일만에 헤어지자는 말을 너무나 쉽게 입에 담은 그였다. 그리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분노에 차서 그에게 따지려고 전화를 한 터였다. 그러나 그의 "여보세요."를 듣고 내 입에서 다른 말이 나가고 말았다. "다시한번 기회를 주면 안돼?"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것도 거의 10분, 20분, 30분동안 침묵을 지키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그의 결정을 망설였고, 우리는 결국 10일 후에 다시 통화를 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10일은 내가 아는 인맥이 100이 있다면 그중 90의 인맥을 동원하는 시간이었다. 아는 모든 사람에게 실연의 아픔을 토로하고 위로를 받고 마음을 추스리고 달랬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의견들을 듣기도 했다. 거의 매일 등산을 하며 마음을 정리했다. 몇개월동안 어마어마하게 큰 일들을 겪었던 삶의 위기의 순간보다 농축된 시간이었다. 이 짧은 10일동안 영혼이 몇배는 성장한 듯 한 그런 세월이었다. 이 연애가 가져다 준 한가지가 있다면 분명 영혼의 성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애 패턴과는 너무도 달랐다. 나는 처음으로 연애에서 상대에게 내가 먼저 맞추려 하고 있었고 그 자체가 이미 커다란 변화였다. 상대가 나에게 해주는 어떤 것 없이 그저 소중해지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스스로 겪는 그 변화가 낯설면서도 크게 다가왔다.

10일의 시간은 길었다. 하루 하루를 매우 길고 크게 보냈다. 산을 타면서 정말 많이 걸었고 그 산자락 하나하나에서 많은 마음을 마주했다. 그러는 동시에 그의 마음도 함께 마주했다. 


어느 날은 그의 마음들을 느껴가고 있었는데 문득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라는 그의 말이 떠올라서 그 말의 속내를 파해치려고 했다. 그러나 할 수없었다. 그 말 자체는 그의 가슴에서 나온 진심이었다. "그래도 좋아해주었던거야."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며 울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그의 마음이 어디까지 맞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의 의식과 연결이 되어있었고 그로부터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였다.


끝내 그 어느때보다도 길었던 10일의 시간이 끝나고 그와 연락하는 날이 되었다. 그가 화상 화면에 보였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만 내가 그가 있는 곳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 연애를 하는 상상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역시 어쩌면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우리 둘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은 연애를 할까 말까를 서로 논의하던 그때부터 서로 인지하고 알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와 연애를 하는 것을 택했던 것이고 나는 그도 똑같은 것들을 고려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의 이야기는 예상을 한참 비껴났다. 그럼에도 나도 그가 곁에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나도 그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더 엄청난 말을 했다. 그는 연애를 할까 말까를 서로 논의하던 초반에 자신의 장점으로서 자신은 결코 질투를 하지 않으며 또한 여러명을 동시에 사귀는 것이 심적으로 불가능 하기 때문에 성실하고 바람 피는 일도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 대해서 못박아서 말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다. 사람은 결코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질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자신있는 표현은 자신이 상대보다 위에 있다는 굉장히 강한 표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질투는 해야지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데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고 자신하는 것은 상대를 내려다봤을때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질투는 썩 즐거운 감정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과 무관하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모습을 비난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다. 그렇게 자신의 성실성을 못박아 말했던 그가 말했다. "나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고 데이트도 할거야. 근데 그걸 너한테는 미안하니까 말하지 않을까 해. 너와의 가능성은 열어둔 채로 다른 사람들도 만날거야." 그렇게 말했다. 이전에 그가 한 말과는 너무도 상반되는 말에 정신의 아찔함을 느꼈다.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을 어디서 어떻게까지 믿어야 할지 갈수록 모르게 되었다. 이전부터도 상반되는 이야기를 던지면서 혼란을 주던 그는 이제 자신이 했던 말도 번복하고 있었고 그것을 내가 들으며 느끼는 혼란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나는 내 지인 중 한명이 연인이건 친구건 관계 자체를 어떻게 하기 이전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를 잘 이야기해보는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는데 그는 그 이야기를 "친구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그에게 우리 나라로 와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이 나라에 오는 것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문득 그가 올 것을 생각하자 기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가 내가 마신 공기, 접하는 공간, 나의 일부이기도 한 이곳 나라와 문화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걸 듣더니 "그럼 그걸 해보자."라고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3일 후에 그는 다시 전화를 해서 자신의 상황으로 이곳에 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관계는 다시 물음표로 가득차게 되었다. 우리 안의 서로에 대한 다음 스텝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 7일 후에 연락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3일을 채우지 않고 나에게 전화하곤 했다. 그렇게 7일을 약속하고 3일에 한번 정도 통화를 하면서 한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그 사이에 다시금 나보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는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제안이고 그 제안을 지키자면 현재 하는 모든 일과 일정을 조율하지 않으면 불가능해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내가 그가 있는 곳에 있지 않은 상태로서는 연애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말에 커다란 압박을 느끼면서 어떻게든 그 상황을 빨리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초조함을 느꼈다. 내 안에는 좀더 느긋한 계획이 있었다. 둘이 연애를 하게 되면 3-4개월에 한번 정도 서로가 만나는 시간을 가지고 점차 서로가 함께 논의하며 함께 지낼 수 있는 방향을 찾아서 그쪽으로 삶을 정리해가려고 했던 큰 계획이었다. 나의 그러한 느긋한 계획의 그의 말에 휘둘리며 본래의 느긋함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다. 생활도 본래 궤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속에서 자신이 있는 곳으로 며칠 오는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듣고 더더욱 섣불리 어떠한 일정도 잡거나 조율하지도 못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또 3일 후에 그는 말을 번복하며 내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생각없는 말들이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기라도 하는 듯 그는 나의 행동이나 계획에 대한 말을 너무나 쉽게 했으며 그렇다고 반대로 나를 위해 스케쥴을 바꾸거나 계획을 바꾸지는 않았다.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에게 끌려다니고 휘둘리고 있었다. 


그를 안보는 시간 동안 나는 계속 매일 산을 타며 마음을 정리했다. 그와 통화하게 될 때 하고 싶은 말들은 보지 않는 시간동안 쌓여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나에게 현재 우리의 관계는 그래서 무엇이냐고 헷깔린다고 문자를 남겼다. 나는 그와 사귀고 싶었다. 아니, 내 안에서는 내가 그의 집에 간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와 사귀기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트는 것이 내 안에서는 매우 어려웠다. 그가 나와 사귀고 있지 않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소화해야 했고 그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내가 너는 나와 사귄적도 없지 않냐고 어느날 호통을 쳤더니 그는 "아니야, 네가 마지막에 있었던 2일 동안은 너는 내 여자친구 였던 것 같아."라고 그가 말했다. 이 어처구니 없는 말에 내 반응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래도 2일동안은 여자친구였구나. 그래 그걸로 충분해. 됐어.' 였다. 그만큼 나는 지쳐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와 약속하고 연락하기로 한 날이 왔다. 그런데 그는 그 약속을 직전에 취소했다.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했다. 나는 그 갑작스러운 취소가 너무나 황망스러워서 잠깐 얼굴만이라도 보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장문의 문자를 남겼다. 왜 나한테 보면 안되겠냐고 물어보냐고 자신이 그것을 거절하기가 힘든데 그것을 왜 헤아려서 처음부터 안 물어주지 않느냐고 화를 냈다. 그러면서 "꺼져버려."라는 글자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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