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별의 불가능성
우리는 2일을 더 같이 데이트를 했다. 하루는 시장에 나가서 구경을 했다. 그는 섹스를 했지만 잠은 따로 자자고 했다. 그날 밤에 꿈을 꿨다. 그와 데이트를 하는데 커플 샷을 같이 찍는 순간이 되자 그가 거부했다. 나는 잠에서 놀라 깼다. 불안한 마음에 그가 자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내가 온지 눈치채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게 세번 계속 악몽에서 깨고 그가 자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와 잠시 같이 있다가 나는 다시 돌아와 잠을 잤다.
나중에 내 꿈을 그에게 말했다. 그는 "그 꿈의 장면이 개연성이 있는 것 같네."라고 했다.
다른 하루는 공원에 갔다.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며칠간 다녔던 데이트 코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숲처럼 이루어진 수목을 보호하는 지역이었다. 이전에는 훨씬 우거져있었다고 한다. 그곳을 역시 손을 잡지 않고 함께 걸었다. 편안했다. 그의 얼굴이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모습에 가까워져있었다. 조금 떨어져서 뒤에서 그를 따라 걸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 처음으로 내가 좋아했던 그의 얼굴을 본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거의 말이 없었지만 말없이 그 공원을 걸었다. 내가 그와의 이전 추억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면이 있었다. 어느날 내가 조금 사고를 치고 숨어다니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멀리서 보고 "나한테서 숨지 마."라고 했다. 나는 이내 그의 앞으로 가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미소지었다. 나도 아마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서로의 눈을 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위쪽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그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내 안에 꽤 깊게 세겨졌다.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면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되었다. 우리가 서로 안지 두달 쯤 지났을 때였다. 그와는 친구사이였다. 자주 대화를 하거나 말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처음만났을 때 나를 도와줬던 그에 대한 고마움이 내 안에는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과 동일한 기분을 나는 그 공원을 걸으며 느끼고 있었다. 말없이 같이 그 길을 걸으며,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의 뒤를 조금 떨어져 걸으면서 예전 생각이 났다. 내가 그와 가장 좋아했던 순간은 섹스의 순간도 포옹의 순간도 아니라 그렇게 둘이 떨어져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였다. 목소리로 전달되지 않았던 무언가가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말없이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그 순간이 좋았다. 그와의 깊은 연결을 느꼈다.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날, 그렇게 최고의 데이트를 했다. 그 공원은 내 안에서 깊이 남았다. 청년 시절부터 그 공원을 좋아했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가 좋아했던 장소들에 쉽게 애정이 갔다. 그도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았다.
그렇지만 나는 동시에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둘이 집안에서 섹스를 하려다가 그가 "할 말이 있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만큼의 트라우마가 이미 하룻밤 사이에 생겨 있었다. 그가 갑작스럽게 나에게 하는 모든 말이 무섭고 두려웠다. 새삼스럽게 할말이 있다며 나에게 할 모든 말이 무서웠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 너에게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공원에서 네가 참 아름답다고 처음으로 느꼈어. 이전에는 몰랐어."라고 말했다. "네 외모가 끌린 적이 없었어.", "네 미소를 보면 혐오감이 일어."라고 그랬던 그의 발전이라면 발전이었지만 그의 말 처럼 '실례'일 수도 있었고, 적어도 사귀는 사람으로부터 듣기에는 한참 부족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말이 나에게 어떻게 들릴지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표현하기 바빴다. 내 무표정이 좋다고 했다. 뭇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던 내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는 것과는 다른 결이었다. 처음 듣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맥락을 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완전히 고요해진 순간에 내 얼굴에 떠오르고 있는 것은 바로 무표정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그 공원에서 나는 그런 순간을 많이 만나고 있었다.
마지막 날은 빨리 찾아왔다. 마지막 날 비행기가 일러서 데이트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섹스 조차도 불가능했다. 그는 잠시 나를 안고 애무를 하다가 이내 멈췄다.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공항에 조금 일찍 가서 비행기 시간이 될 때까지 함께 있고 싶었다. 그가 그냥 공항 앞에 나를 내려줄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때서야 나는 서둘러서 주차하고 나를 배웅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항에서 마지막은 포옹도, 키스도 없었다. 그는 잠시 내 눈을 보고 뒤돌아서 가버렸다. 비행기 시간이 될 때까지 함께 있지도 못했다. 나는 비행기 시간까지의 긴 시간을 공항 카페에서 혼자 보냈다. 그는 연락을 하는 것도 싫어하는 듯 했다. 그렇게 나는 비행기를 다시 타고 귀국했다.
너무나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 나는 더 이상 그와의 정해진 데이트 약속도 만날 기약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로 돌아왔다. 막상 그렇게 되니 그에게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전에 우리는 매일 통화를 했지만 그것은 섹스에 대한 말다툼과 그곳에 가기 위한 준비과정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나는 그에게 문자를 적었다.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적기도 하고 그에 따라 생각나는 나의 생각을 적기도 했다.
그는 거기에 내가 이기적이라고, 자신이 재미있게 읽을 만한 이야기를 적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한다고 했다. 나는 나에 대해 그가 더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문자를 했는데, 그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 사이에 그와 통화도 몇번 했다. "사랑을 다시 하고 싶다."는 그의 말 자체가 거짓은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데 어떻게 판단을 해야할지를 물었다. 그는 그것이 사실이면 안되느냐고 했다. 계속 혼란스러웠다.
이틀 정도가 지나면서 그의 먼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한없이 다시 불안해졌다. 그러면서 저편에 가라앉았던 상처들이 올라왔다. 나는 그에게 장문의 글을 남겼다. 나는 사귐을 이미 전제로 하고 갔는데, 너는 어째서 그렇지 않았냐고, 네 이야기는 사귐을 전제로 하지조차 않았다고 적었다. 그 사이에서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나 괴로운지를 적었다.
그는 통화하던 중간에 내가 그의 집에 있을 때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시끄러웠다고 그러며 그 생각을 하니 슬퍼진다고 했다. 나중에 다시 통화를 했는데 그는 우리의 관계가 연애 관계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심리 치료를 해주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연애가 아니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와의 연애가 처음부터 일반적인 연애와 동떨어질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의 친구관계도 그러했고 그의 성격도 그러했다. 나는 그런 것을 각오한 후에 그럼에도 그와 연애를 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그래서 그의 그 새삼스럽지도 않은 지적이 낯설었다. 나에게는 그러한 지적이 우리가 '사귀지 않아야 할'이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조금 숨을 돌리더니 갑자기 말했다. "끝났어. 헤어지겠어." 귀국한지 겨우 2일이 지난 이후였다. 귀국하고 2일을 채 버티지 못하고 그는 이렇게 쉽게 헤어짐을 이야기했다. 나를 초대하고 4일째 되는 날 이미 사귀고 있지 않음을 선언한 그였다. 헤어짐 자체가 성립이나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그는 그렇게 또다시금 나에게 갑자기 통보했다. 상처를 입은 것도 힘이 드는 것도 나였는데 그는 그냥 마치 장난하듯이 너무나 쉽게 이별을 입에 담았다. 그와 작별 인사를 했다. 어쩐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후련해져서 그냥 좋은 덕담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파란만장한 그간의 일들을 보고했다. 친구들은 그의 태도를 비난하며 내 편을 들어주며 버리라고 잘 헤어졌다고 해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통화를 하는 사이에 내 안에 슬글슬금 그를 향한 분노가 올라왔다. 친구들 말대로 그는 나에게 함부로 한 그런 사람이었나. 갑자기 그에게 따지고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어지고 다시는 연락을 서로 안하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연락도 안받으리라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쉽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에게 분노에 차서 그에게 따지려고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여보세요"라는 그의 음성을 듣자 마자 내 입이 내가 전화한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해버렸다. "다시한번 기회를 주면 안돼?"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