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노는기록 #33 , 시 필사하기
이 시간이 좀 더 오래토록 그대로 멈춰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잔잔하고 미지근한 순간을 맡닥드리면 시간을 붙잡고 싶어서 조용히 펜을 잡는다.
글씨를 공책에 한 자,한 자 적어내려가는 동안엔 시간의 호흡이라도
느낄수 있을것만 같이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알듯, 모를듯 낭만적인 암호 같은 박인환의 시와 a4용지 절반 크기의 줄공책,
그리고 종이 위에 서걱이는 가느다랔 파이롯트 쥬스업 0.3mm 펜은 나의 최애 필사템들이다.
시인이 포틀랜드에서 들었다는 글렌밀러의 랩소디가 어떤 곡이었을까를 상상하며
글렌밀러의 앨범을 통째로 재생하는 것 또한 글씨 쓰는 맛을 내기에 좋다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바람이 찾아와 문은 열리고 찬 눈은 가슴에 떨어진다.
힘 없이 반항하던 나는 겨울이라 떠나지 못하겠다>
시인이 이 문장를 짓는 날엔 비가왔을까? 새벽이었을까, 저녁이었을까? 여름이었을까?
수험생시절엔 부정적단어에 세모를, 긍정적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고
내가 아닌 출제자가 시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30초안에 분석하는
궁예의 관심법 같기만 한 기술을 습득하는데 모든 걸 걸었는데
그런 족쇄에서 벗어나자 나는 그냥 시인이 문장을 짓던 날의 날씨와 온도,
그리고 계절이 궁금할 뿐이었다.
비밀스런 문장들에 흠뻑 빠져 이런저런 물음표들을 띄우는 동안
흘러가는 시간들은 노트에 잉크가 되어 적셔진다
붙잡고 싶었던 시간들은 그렇게 좋아하는 시가 되어 페이지마다 남았다.
다시 노트를 펴는 날, 내가 써내려간 글씨들이 어느때보다도 평안했던 오늘 하루를 전해줄 것이다.
Tip)
- 펜 파이롯트 쥬스업 0.3mm 2,400원
- 박인환 전 시집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