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따라 봤다. 3층 높이의 건물. 안으로 열리는 문. 저 문은 왜 있는 걸까. 그곳을 올려다 볼 때의 상황은 3층 밖으로 문이 날 상황보다 덜 납득 가능했다. 그걸 재밌다고 찍던 흔적. 그건 그보다 훨씬 덜 납득가능하다. 5년 지난 사진으로 글을 쓰는 건 납득 가능 수준을 아득히 넘었다. 내가 하는 일조차 납득 불가다. 세상은 납득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납득 수용력도 허접스러우면서 왜 납득해야 인정하는 것일까. 그냥 받아 들이면 되는 건데...
'그냥 그렇구나'하면 되는 일에 이유를 따지고 든다. 스스로만 괴롭다. 천붕지괴(天崩地壞),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것을 걱정하던 중국 기(杞)의 사람의 이야기다.그은 자신의 수준으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와 '땅이 꺼지지 않는 이유'를 찾았을 것이다. 그것이 납득되면 안심할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작동하는 사고방식이 거기서만 그렇게 작동될리 없다. 그 사고방식은 아마 다른 걱정을 낳을 것이다. 하나를 해결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생각하는 방식의 문제다.
부채장수와 우산장수 아들의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녀는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큰 아들은 우산장수고, 작은 아들은 부채장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날마다 걱정이었다. 날은 덥기도하고 비가오기도 했다. 항상 아들들이 문제였다. 날이 더우면 우산장수 아들이 걱정되고, 비가 오면 부채장수 아들이 걱정됐다. 비가 내려 날이 시원해지면 부채가 팔리지 않을 것이고, 날이 더워 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산이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걱정의 날로 가득했다. 전래 동화의 내용은 정확히 기억에 나지 않는다. 떠올려 보건데, 그녀의 곁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이렇게 말했다.
"날이 더우면 부채장수의 부채가 잘 팔리고, 비가오면 우산장수의 우산이 잘 팔리니 언제나 좋은 날이 아닙니까."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의 변화. 그것은 세상 현상을 그대로 두고도 모든 것을 바꾼다.
'긍정과 낙천'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다만 '긍정주의'는 '낙천주의'와 다르다. 낙천주의는 인생을 즐겁게 사는 일이다. 긍정주의는 올바르게 받아드리는 일이다. 긍정주의를 좋게 생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긍정주의는 '상대의 말에 긍정하다'처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일이다. 낙천주의는 긍정주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부채장수와 우산장수의 어머니는 현상을 그대로 두고 걱정에서 해방됐다. 이유는 보지 못한 다른 시선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원래 현상은 두 개, 세 개, 네 개 이상의 다면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긍정주의다. 모든 가능성 중 좋은 면만 혹은 나쁜 면만 보는 것이 '부정'이다. 낙천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긍정주의가 되어야 한다. 긍정주의는 상황을 받아드릴 수 있는 수용력을 기른다. '그럴 수 있어'라고 다각면에서 수용하게 한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 후에 '낙천주의'로 가면 된다. 낙천주의는 긍정으로 받아드린 여러 시각 중 세상과 인생을 즐겁고 좋은 것으로 시선을 선택하는 일이다. 고로 낙천주의는 긍정주의의 선행이 반드시 필요하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수용로 끌려간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로 끌려갔지만, 자신의 처지를 인정했다. 그러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밝은 쪽으로 두었다. 만약 그가 무조건적인 낙천주의자였다면 끌려가는 상황도 좋은 현상이라여기고 전쟁 상황도 잘된 일이라고 받아드리는 오류를 낳았을 것이다. 다행이 그는 긍정주의자였고 자신의 상황을 이해한 뒤, 그 뒤에 낙천주의를 받아들여다. 이미 일어난 일은 덮어두고 그래서 뭘 선택할꺼냐는 옵션만 남는다. 누군가는 보기가 1번 뿐인 답지를 만날 것이고, 누군가는 1번과 2번이 있는 정답지를 만날 것이다. 다만 정답은 그 중에 없을 수도 있다. 3번, 4번, 5번... 수 많은 옵션을 열어두면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오답을 고르는 '최악'을 피하고 '차악'이나 '차선', 어쩌면 '최선'을 골라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