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기록해 두자면 스캐치북이나 색종이 따위는 사준 적이 없다. 아이는 사무실에 있던 A4용지를 마음껏 사용하며 자랐다.
그때 이후로 A4용지는 아이의 장난감이나 다름없다. 5천원이면 거의 무한에 가깝게 글을 쓸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만들기도 할 수 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식탁 위에 종이 더미가 있다. 있다. 매일 거의 10장에 가까운 그림과 만들기 작품이 올라와 있었는데 그날은 '소설'이 적혀 있다.
나중에 봤더니 '창작동화'다.
아이에게 '글을 쓰라고 시킨 적'은 없다.
다만 아이와 자기 전에 '이야기 만들기' 놀이를 하거나, 동화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하기는 한다.
몇 일 전에 읽은 동화책은 '이야기 짓는 동화책'이었다. '낱말 먹는 고래'라는 책이다.
단어 몇 개를 던져주고 그 단어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부분이 뒤에 잠깐 나왔다. 아이에게 '이야기 짓는 방법'을 예로 들었다.
가령, 페이지에는 아무 상관없는 단어가 널려 있다.
가위, 달, 소녀, 시계, 바퀴, 거북이, 비행기 등이다. 이런 단어들 중 마음에 드는 몇가지를 골라서 이야기를 짓는 것이다.
대충 예를 들면 이렇다.
*
'가위로 달을 오린 소녀'
소녀는 가위로 달을 오렸어요. 너무 밝고 예쁜 달을 주머니 속에 넣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소녀가 달을 오려 주머니 속에 넣자. 이상한 일이 일어 났어요.
세상이 어두워진 거에요. 친구들은 약속 시간에 늦기도 하고 낮에도 밤에도 잠을 자는 친구도 있었어요, 소녀는 오려진 달 자리에 '시계'를 붙였어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밝은 시계가 달 대신에 시간을 알려 주었죠.
그러던 어느 날 이었어요.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자신이 붙여둔 달 대신에 하늘 위에 바퀴가 붙어 있는 걸 보게 됐어요. 시계 대신에 바퀴가 있자, 다시 세상은 어두어졌어요.
'누구의 짓이지?'
소녀는 '비행기를 타고 달이 된 '바퀴'까지 날아갔어요. 그리고 알게 됐어요. 이웃에 사는 친구 '거북이'가 시계를 갖고 싶어서 달과 바꾼 것이 었어요.
소녀는 함부로 달을 오려 가져간 것을 후회했어요.
그리고 달을 제자리에 붙여두고 다시는 가져가지 않기로 약속 했답니다.
*
즉흥적으로 지은 말이지만 전혀 상관없는 '단어'가 서로 유기성을 갖기 위해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됐다.
아이에게 이야기 지는 법을 알려 준 뒤로 아이의 이야기는 성인인 내가 봐도 꽤 흥미로운 소재를 갖게 됐다.
아이를 '소설가'로 만들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무엇을 하던 자기 소설을 쓰면서 사는 것도 꽤 재밌는 취미가 될 것 같다.
아이에게 그런 재능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은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