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할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원제 스님'이 하는 말이다. 말에 따르면 영원한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러한 사랑을 찾는 사람의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고 뒤바뀌기 때문이다.
스님의 '세계여행기'라는 꽤 독특한 소재의 에세이를 서점에서 골라왔다. '술술' 읽히다가 어느 순간에는 '스님'이라는 '작가'의 특성과 '세계여행'이라는 소재 때문에 적잖은 의문을 받을 듯였다.인터넷 서칭을 해보니 실제로 그랬다.
수필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모두는 다만 스스로를 살 뿐이다. 다만 직업이 주는 정형화 된 틀에 적확한 인물이 되기를 사람들은 바라는 모양이다. '선생'은 용모 단정하고 바른 삶을 살고 '스님'이라면 '속세'와 '욕'에 먼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강박은 모두 가지고 있다.
물론 그런 모습이 직업의 본질에 가깝다. 다만 과연 '직업적 본질'에 '자아'를 일치하는 삶이 스스로의 선인가는 생각해볼 만하다.
글을 쓰다보면, 우연히 알고리즘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기회를 얻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적잖히 놀란다. 생각보다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프로불편러'들도 많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악플'이나 '욕설'도 많다. 그들이 존재하는 바와 같은 이유로 '나' 또한 다만 '나'로 존재할 이유가 된다.
얼마전 지인과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담배피는 학생을 보았을 때, 훈계를 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로 지나가다가 중학생 무리가 담배피는 모습을 보고 훈계한 적은 있다. '훈계'라기보다 '끊으라고는 안 할테니까, 어른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피우라'고 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담배끊어'라고 한다고 그들이 끊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학생의 흡연은 '불법'도 아니다. 그들을 보며 '어짜피 본인 인생'이라고 답한 적 있다. 어른으로써의 무책임일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모든 일에 훈계할 수는 없다.
공부는 왜 안하니, 집에는 언제 들어가니, 집에 들어가면 손은 씻었니, 등
학창시절 친구들과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어른에게 훈계를 받은 적 있다. 늦은 시간도 아니고 친구들과 축구 게임 2시간 했을 뿐이다. 그 훈계를 받았다고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의 인생에 관여하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이상의 책임을 지어야 한다. 대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만큼 묵직한 책임을 갖지 않으면 스스로 질 수 있는 책임 정도까지만 관여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쨌건 삶의 종류는 워낙 다양하다. 고로 '저런 삶'도 '삶이다'하고 관용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통계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하루 한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고로 매일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고 누군가는 살해 가족이나 지인이 된다. 다시 누군가는 당사자가 된다
극단적인 '살인'을 예로 든 것은 그런 극단적인 일조차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라는 일이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여기는 일과 '보통', '평범'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며 움직일 수 있는지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개성있는 스님을 알았다. 세상을 보며 자기 공부를 하고, 세상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자아에 내가 담겨 함께 세계를 여행한 느낌이다.
책에는 '차경'이라는 '모자'가 등장한다. 원제 스님은 여행 중 구매한 모자에 '차경'이라는 한자로 된 이름을 지어준다. 모자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소지품에 모두 이름을 짓는다. 이름이 지어지고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면 비로서 관계가 형성된다. 단지 '도구'에서 '관계'가 형성되니 꽤 인간과 닮은 추억거리도 만들어진다. 이를 보며 스스로도 주변 소지품을 '도구' 이상으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본적으로 여행 서적을 좋아하지만 이번 여행책은 꽤 매력적인 소재와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