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군가에게는 망상적인 이야기이겠지만 혹은 비현실적인, 허황되거나 의미 없는 이야기겠지만, 최근 이 물음이 내 삶의 순간을 함께 했다.
아이와 동네 서점에서 책구경을 하다 가장 얇은 책 하나를 골라 집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죽일 수 있는 가벼운 단편을 집어 든 것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가볍게 첫장을 넘기고, 두번 째 장을 넘겼다.
'톨스토이가 쓴..', '민음사 고전..', '죽어가는 한 남자의 기록..'
그 키워드가 가슴으로 다가왔다. 한 손에 잡히는 가벼운 소설이 갑자기 묵직해졌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면 여기저기 많다. 전쟁이나 범죄 영화에서는 너무나 쉽게 죽음을 묘사하고 그 죽음에 '극'이라는 설정이 자각되면 아무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꽤 현실적이다. 멀쩡하던 한 남자가 병을 얻고 서서히 죽어가는 묘사, 죽음을 맞이하면서 겪는 다양한 생각의 변화, 주변, 그 주변을 바라보는 죽어가는 사람의 질투와 감사함, 반복되는 희망과 좌절.
단 하나의 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시선이 묘사된다.
아이와 정신없이 서점을 나오느라 '책'은 구매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훑었던 책의 이야기가 아른거렸다.
'아직 읽어야 할 책도 많은데...' 하다가도
'그러나 지금 읽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겠다.' 싶어 아침 일찍 서점 문앞을 기다리다가 첫 손님으로 지체없이 책한권 집고 나왔다.
그후 단숨에 읽었다.
안정된 미래와 세속적 성공에 대한 추구, 인정 받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종국에 가서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반 일리치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삶의 터전이 그저 허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내가 부여 잡고 있는 것들 또한 무너지면 빈 껍데기일 뿐이지 않을까.
이반 일리치는 법조계에서 일하는 러시아 제국의 상류층 관료다. 비교적 평탄한 경로를 밟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룬다. 그의 커리어가 전형적인 모범적 공무원의 그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법률 공부를 하고 법관이 된다. 경력을 쌓으며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와 존경을 받는다. 매순간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자신의 업무에 규칙과 절차를 지킨다.
도덕적으로 명백한 '오류'를 저지르지도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충실히 따르며 부정을 저지르거나 불의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되려 법관에 맞도록 규칙과 법, 절차를 중시하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삶의 전반에는 깊은 차원의 도덕적 결핍이나 오류는 없다.
그런 그가 종국에 와서 자신의 삶을 톺아가며 느낀 오류라면 '타인의 기준에 맞춘 표면적 삶',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한 고찰의 부재' 정도일까.
소설의 중반부에 나약해가는 자신을 보며 그나마 놓치 못하고 한평생 모신 '품위'를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모범적 법관이 시간이 지나며 점차 죽음을 맞이하는 그라데이션 된 과정을 지켜보면서 평범한 일상이 '비현실'로 넘어감을 경험한다.
육체보다는 정신이 나약해지고 지독해져 간다. 갖추고 있던 모든 허울이 '스르르' 녹으며 '삶'에서 갖추던 모든 것들이 '태생적'으로 돌아감을 관찰하게 된다.
가끔, 아니면 거의 매순간 우리는 '필멸자'의 숙명을 잊는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주가를 바라보고 비싼 자동차와 그럴싸한 직업을 소유하고자 치열하며, 괜찮은 취미를 가지고 다수의 존경을 갈망한다. 그 놓지 못하는 먼지 같은 것들이 자신을 지탱해 준다고 착각하며 고개를 하늘을 향해 들어올린다.
이반 일리치에게 있어서도 집, 직장, 사회적 성공은 견고한 삶의 축이었다. 다만 죽음이 그의 삶에 문을 두드리는 순간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하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모든 관계가, 모든 성공이, 그가 믿고 있었던 모든 가치가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린다.
'하인'에게 의지하고 싶고 아이처럼 위로 받고 싶어한다. 나약함 앞에 '지위'는 '인간'을 구분하는 선이 되지 못한다. 죽음 앞에 모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빈손이다.
'제일 가벼운 책'이라는 '가벼운 마음'이 선택했던 이 책이 묵직하게 다가와 가슴에 내려 앉는다. 결코 단번으로 끝내서는 안 될 책이다. 스스로가 '필멸자'라는 착오에 빠질 때, 스스로 오만해지고 세속적 좌절과 고민에 쌓여 있을 때.
그때마다 꺼내봐야 할 명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