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책을 읽는 순서)
나에겐 오래된 습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의식과도 같다. 바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가격표를 보면서 독서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습관은 굳이 만들려고 하진 않았다. 언젠가부터 마치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됐다. 책을 구매할 때 가격표를 확인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책을 사랑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얼핏 정말 명품 옷이거나 명품차, 명품 액세서리를 구매할 때, 가격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낭패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자신의 경제력에 무한한 자신감이 있는 누군가라면 어쩌면 가격도 확인하지 않고 얼마가 할인이 되는지, 어떤 프로모션이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구매한 명품들에 무감각할 것이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이제 막 첫 출판을 한 초보 작가의 책과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와 명품으로 알려져 있는 고전, 엄청난 고학자들의 베스트셀러 할 것 없이 웬만하면 2만 원 내외면 구매 가능하다. '빌 게이츠,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이라는 책, 우리는 세계 최고 부자라고 불리는 빌 게이츠의 생각을 단 돈 16,000원이면 읽어 볼 수 있다.
책의 가격이 저렴하다고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보잘것없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명사의 글도 2만 원 내외고, 최고의 부자의 글도 2만 원 내외다. 엄청난 고학자의 글도 2만 원 내외고 오랫동안 인생을 공부하신 고승이나 신부의 글도 2만 원 내외이다. 삼성전자의 권오현 회장님의 글과 나의 초년작 '앞으로 더 잘 될 거야'의 글은 4,000원 차이다. 우리는 엄청난 명품과 비싼 지식과 삶과 성공에 대한 비밀이 잔뜩 감겨 있는 백화점에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 들고 가면 많게는 5권 적게는 1~2권 까지 들고 나올 수 있다. 이에 나는 책 값은 사실 '공짜'다 라고 생각한다. 책의 가격은 공짜를 넘어 가격과 정보에 한해서는 상당한 불공정 시장인 샘이다. 마음만 먹으면 중국, 일본, 미국에서 내노라는 사람들의 글을 모두 읽어 내 머릿속에 담아 둘 수 있다. 매년 감가상각이 발생하는 비싼 명품 따위와는 비교 불가능하다. 공짜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이토록 명품이 불공정한 가격에 거래되는 시장에서 우리는 공짜를 넘어 되려 구매할수록 이득이 되는 특이한 경험을 갖게 된다.
나는 책을 보면, 가장 먼저 책의 제목을 본다. 그리고 첫 표지에 적혀 있는 소제목을 본다. 대략 어떤 글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확인한 뒤에는 저자를 살펴본다. 저자를 살펴보면, 이 책의 대략적인 방향을 알 수 있고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으며, 어떤 걸 주의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내가 가장 주의하는 책은 '전업작가의 글'이다. (전업작가의 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님). 내가 전업작가의 글을 주의하는 것은 바로 살아 있는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다. 인공지능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인공지능의 현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글을 읽어보고 싶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업을 실제로 운영하고 있는 사람의 글을 읽어보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의 글을 읽었다. 그는 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투자를 해야 100전 100승을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책을 다 읽고 저자를 살펴봤다. 그는 글을 쓰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투자로 성공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글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짜집어 보기 좋게 편집했을 수도 있겠으나, 작성한 사람이 스스로 실천하지 못한 글에 신뢰를 하기 힘들다.
저자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후에, 책을 읽는 도중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기도 하고 다시 앞으로가 저자를 몇 차례 확인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고 나서는 서문을 읽는다. 이것을 그냥 건너뛰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출판을 했을 때 서문은 책의 원고가 마무리되고 나면서, 출판사에 제일 마지막으로 보내는 글이다. 저자는 사실 책이 완성되기 전까지 자신조차 그 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이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책을 몇 차례 퇴고하고 수정하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수 번을 더 읽어보면서, 어떤 부분을 집중해 읽으면 좋다거나, 어떤 부분에 있어서 본인도 의문인지에 대해서 솔직하고 가감하게 써준다. 이는 어떻게 보면 작가가 말하는 책의 사용설명서와 같다. 그 뒤에는 목차를 본다. 책의 전개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에 대한 대략적인 감을 잡고 그리고 본문으로 넘어간다. 본문을 정독하고 난 뒤에는 '감사의 글'까지 꼼꼼하게 읽는다. 양심이 있다면 이런 불공정 거래에 승인해 준 출판사와 작가 님에게 감사의 글을 읽는 수고스러움을 봉사해야 한다. 솔직히, 대게 비슷한데, 사랑하는 가족과 출판사에 감사하다. 책을 쓰는데 도움을 주신 아무개에게 감사하다는 의미 없는 인삿글인 경우가 대다수다. 그럼에도 읽는 것은 은인에 대한 값싼 보답 정도다.
마지막으로 책의 뒤편에 추천사나 짧은 한 줄 서평을 읽는다. 대략 나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하고 뒷날개에 달려 있는 광고를 본다. 내가 도서 광고를 보는 이유는 이렇다. 책은 솔직히 말하면 '봉사' 혹은 '사회 기부' 같은 불공정 거래다. 대부분의 책은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책 값에 10%에 해당되는 인세는 결코 작가를 부자로 만들어주기 힘들다. 대한민국 국민 5000명 중 한 명이 그 책을 구매해 준다고 해도 저자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1000만 원~1600만 원 사이다. 대한민국에 책을 쓰고 있는 다수는 본업 작가가 아니다. 작가는 본업으로 했을 때 결코 먹고 살기 쉽지 않다. 그들은 대다수 본업을 따로 갖고 있으며 자신의 생업의 시간을 짧게 쪼개고 쪼개어 쉬고 싶고 놀고 싶은 피 같은 틈새시간을 할애하여 책을 출판한다. 그리고 한 권 당 1천 원 정도 되는 작은 수익을 얻어간다. 결코 돈을 보고자 한다면 할 수 없는 행위들이다. 그런 돈이 묻어 있지 않은 선행을 믿는다. (물론, 오롯이 돈을 벌기 위해서 출판을 도구로 삼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순 없다)
끝으로 책을 다 읽고 나서 가격을 본다. 가격을 보는 이유는 두 가지 경우다. 아주 쓰레기 같은 책을 만났을 때와 너무 만족하는 책을 만났을 때가 모두 다르다. 책을 읽고 아주 쓰레기 같은 책을 만났을 때, 책의 가격을 보고 화가 가라앉는다. 작가는 단 한 번의 수고스러움으로 다수에게 내용을 전달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작가로부터 일정 시간 동안 이야기를 받는다. 그 책이 만약 3시간 정도 걸려서 완독이 되는 책이라면, 저자는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최저임금의 시간도 쓰지 않는 것이다. 또한 비슷한 분량의 공책도 요즘은 1만 원 한다. 1만 5천 원에 그 책을 구매했다는 것은 5천 원짜리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어차피 얼마에 팔더라도 구매자가 이득이다.
두 번째로 아주 만족한 책을 읽었을 때는 몹시 돈 벌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훌륭한 책인 경우. '사피엔스', '총 균 쇠', '코스모스' 등. 이 책들은 사실 수 천만 원 이상의 값어치들이 있다. 이것을 고작 3만 원도 안 되는 돈에 샀다는 것은 땅에 떨어진 황금을 주운 느낌이다. 심지어 두 번을 보면 값어치는 더 줄어든다. 세 번, 네 번을 읽을 수도 있고 자녀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이런 엄청나게 불공정한 거래를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지식과 지혜, 상식을 입에 떠먹여 주기 위해 서점에서 조용히 내 구매를 기다려주는 책들은 보석과도 같다. 이런 보석들이 세상없는 떨이 가격에 이처럼 쉽게 주워 담아갈 수 있는데, 이를 주워가지 않는 사람들과 잽싸게 주워가는 사람들의 차이는 확실하게 있다. 그런 고급 정보를 완전 X값으로 주워 갈 수 있다는 행운에 매번 감사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현명한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한 신뢰가 생성되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신뢰와 유대가 되고 서로 좋은 인연도 만들어진다. 워런 버핏과의 점심식사가 54억이라고 한다. 실제 워런 버핏은 저서가 없지만 그처럼 유명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54억을 쓰면서 빌 게이츠, 마윈 등 세계적인 부자들이 거의 종이값만 받고 파는 이야기에는 무관심하다니 아이러니하다. 최소 그들의 이야기도 50억쯤의 가치는 가질 것이다. 이 이야기를 2만 원의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데 어찌 안사고 배길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