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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발] 배설물을 섭취하다

by 오인환

책을 읽으면 내용 100을 흡수하고 아무리 서평이나 독후감을 잘 써도, 글로 남길 수 있는 건 많아도 20%도 안 되는 것 같다.

정말 영양가 있는 내용의 책을 읽어놓고, 서평에 정성 것 글을 쓰지만, 언젠가 서평에 쓰지 못했던 글인데 머릿속 어딘가에 있다가,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결국, 내가 얻어먹는 정보 또한, 고학자들의 쓴 글을 통해 얻어지는 거라고 보면, 나 또한 그들이 소화하다 남은 배설을 주워 먹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누구나 배설을 해야 한다. 배설을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못하는 것은 못 먹는 것보다 더 큰일이 일어난다.

책을 읽기만 하고, 글을 쓰지 못한다면, 어쩌면, 과식 후 배설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어린 시절 시골 할머니 댁에는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볼 일을 보려고 가면, 밑에는 한 가득 배설물이 있고, 그곳에는 하얀색 구더기가 바글바글 했다. 배설물은 누군가의 영양분이기도 하다. 그냥 영양분이 아니라 생존 필수적인 영양분이기도 하다.

농장에 일 년에 한 번은 거름을 한다. 거름이라고 대단한 것이 아니다. 소나 닭의 배설물과 기타 재료를 섞어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밭에 골고루 가기를 바라며 20kg의 무게의 포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머리에 짊어지고 나른다. 나르다 보면, 손톱 끝까지 냄새가 베일 때가 있다.

하지만 더럽지 않다. 이 영양분은 나무로 공급되어, 질 좋은 상품을 만들어낸다. 배설물을 집어삼킨 한라봉, 천혜향, 황금향은 향기로운 향을 내뿜은 과일로 탄생한다.

내가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또한, 나를 스치고 나온 찌꺼기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좋은 거름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나 또한 누간가가 남긴 찌꺼기와 배설물을 열심히 섭취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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