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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Jul 20. 2021

떡도 실도 에미도 아니랑께

- ‘아줌마’의 독립선언  [가까운 말들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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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말들04]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방언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은 곧 방언입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온기, 향기, 열기를 짧은 글 속에 담아봤습니다. 우리 삶의 힘이 될 수 있는 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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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중년의 여자가 있다. 뭐라 불러야 하는가? 뭔가 뚜렷한 직업이 있고 직책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없다. 아줌마든 아주머니든 입에 올렸다간 경을 치기 쉽다. 그것을 피하려 누님, 이모님, 어머님 모두 동원해 보지만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어색하고 정작 그 이름으로 불려야 할 이는 서운할 수도 있다. 중년 남자는 사장님이라 눙칠 수도 있지만 중년 여자를 사모님이라 하기도 어색하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모든 곳에서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드라마 <아줌마>의  주인공 원미경 씨, '아줌마'란 단어는 그렇지 않지만 이 땅의 모든 아줌마는 곱다. 원미경 씨처럼.  


"화순떡, 저 왔으요."


화순떡? 별명인가? 희한한 별명이다. 담양의 명옥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당 깊은 집, 담 밑에 노랗게 핀 수선화를 바라보며 마당을 건너면 마루 맡에 나앉은 화순떡이라 불리는 중년의 여자를 만날 수 있다. 대학 같은 과 동기이자 광주와 담양 일대 답사의 안내를 맡은 문 기자가 한걸음에 그녀 곁으로 달려가 손을 부여잡고 인사를 나눈다.


명옥헌의 배롱나무, 명옥헌 원림은 묘한 매력이 있다. 마을 전체가 정원이다.
화순떡의 집 마당에 피어 있던 수선화. 역시 아줌마처럼 곱다.


“문 기자님, 그 기사 봤소. 나가 그러지 않았소. 조 선생님이 첫사랑을 배신해서 차 불고 염 대장한테 빠진 것 같다고. 근디 내 얘기랑 똑같이 기사가 났드만.”

“어이구, 송 작가님 얘기 듣고 제가 먼저 기사를 쓸 걸 그랬네요.”


송 작가? 모르는 작가다. 지역에 가면 흔히 만날 수 있는 ‘자칭 작가’인가? 영화 <넘버 3>에 나오는 ‘랭보’에게 지도를 받는 ‘지나’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문학소녀의 꿈을 간직한?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작가의 행색은 아니다. 밭에 철푸덕 앉으면 딱 어울릴 듯한 ‘몸뻬 바지’에 진달래 빛 ‘쉐타’를 걸친 오십 대 후반의 시골 아낙 딱 그 모습이다. 그리고 미안스럽게도 자꾸 그녀의 얼굴에 눈이 간다. 콧등과 그 주변에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남아 있는, 이효석이라면 ‘얼금뱅이’라고 묘사했을 그 얼굴이다.


문 기자와는 여러 차례 만남이 있었던 듯 인사말을 건넬 새도 없이 조정래의 <태백산맥> 얘기부터 꺼낸다. 아무래도 초반에 작가의 초점이 김범우에게 맞춰져 있다가 어느 순간 염상진으로 바뀌는 듯한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듯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문학에 문외한인 내 귀에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 소리와 몇몇 특징적인 어휘만 들어온다.


“사투리 공부하는 내 대학 친군디요 작가님 얘기 많이 들려주세요.”

“무신 야그요? 울 아버지가 나 핵교 보내기 싫어서 내 나이 열여덟에 쌀 스무 가마니에 얹어서 시집 보낸 야그요? 남편이란 작자는 있기는 있는디 허구헌 날 밖으로 싸돌아댕기문서 난봉질 한 야그요?”


따발총처럼 쏟아내는 그녀의 이야기 때문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방언조사를 다니면 늘 듣게 되는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지만 어찌 된 일인지 대부분 기구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지역에서 유세깨나 떨친다는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 시와 소설을 좋아해 대학 국문과에 입학하는 게 꿈이었던 그녀의 이야기다. 그런데 한참 노름에 빠져 있던 그의 아버지는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전 쌀 스무 가마를 탈탈 털어 막내를 팔아치우듯 시집을 보내 버린다.


“아부지가 원망스럽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요. 아부지와 오빠들이 다 털어먹은 집안의 막내딸이 대학은 무슨 대학, 아부지가 그렇게라도 팔아치우듯 보내지 않았으문 시집은 무슨 시집. 날 끔찍이 이뻐하던 아부지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게 그거라는 걸 내 왜 모르겄소.”


아무리 노년에 노름에 빠져 기울어가는 집안은 팽개쳤을지라도 막내딸은 늘 가슴에 걸렸던 듯, 여자의 아버지는 마지막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재산을 털어 딸을 시집보냈던 듯하다. 살짝 얽은 얼굴 때문에 신랑 자리로 선뜻 나서지 않으니 쌀 스무 가마니까지 얹어서 보냈다. 웃돈을 얹어서 딸을 여의었으니 여자는 팔아치웠다는 표현을 쓴다. 대학은 못 보내도 시집을 보내야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여자가 모를 리 없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향한 원망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쌍봉사 갈라고 하는데 화순떡도 같이 갈라요? 오랜만에 고향 땅도 밟아 보고.”

“싫다고 안 혔소. 화순 쪽으로는 돌아 눕지도 않을라요.”

“아 화순떡이 아니라 화순댁이었네요. 화순이 친정이신가요.”

“문 기자님, 자꾸 떡, 떡 하지 말라지 않으요. 자꾸 그랑께 저 양반도 나를 떡으로 보잖소.”


그제서야 ‘화순떡’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화순의 쌍봉사, 멋진 부도탑이 있다는 문기자의 말에 가볼 계획이었는데 말동무도 할 겸 화순떡, 아니 화순댁과 동행할 생각이었나 보다. 화순에서 시집왔으면 화순댁이고 서울에서 시집왔으면 서울댁이다. 그런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늘 봐왔던 ‘댁’은 대개 식모나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 그런 편견이 있어서 그런지 화순떡의 말이 수긍이 간다. 게다가 돌아보기도 싫은 친정 동네라 하지 않는가.


“여기서는 화순떡이면 화순에 가면 무슨 실이 되나요? 김실이? 박실이?”

“거봐요, 문 기자님이 나를 떡으로 봉께 이 양반도 내 부아를 돋구잖소. 웬수 같은 서방 성씨는 알아서 뭐 할라 그라요. 박 씨 성을 가진 애새끼들은 여기저기 싸질러 놓구는 이 집에 발 끊은 지가 언젠디.”

“아이구,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이 지역에서 쓰는 여자들 호칭이 재미있어서 여쭤본 겁니다.”

“그게 뭐땀시 재미지요. 지 이름 석자 놔 두고 평생 떡이, 실이, 에미로 불리는 게 뭐가 재미지다요.”


친구 따라 담양 왔다가 공연히 욕만 바가지로 먹는 형국이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이야기보따리가 열릴 테니 방언조사 겸 해서 만나보라 해서 왔는데 오자마자 심기를 건드려 놓으니 그 화살이 내게로 향한다. 쌀 스무 가마에 자신을 떠넘긴 아버지보다 그걸 널름 받고는 첫날밤부터 소박을 놓은 박 씨 성을 가진 남편이 더 싫은가 보다. 하긴 한이 맺힐 노릇이다.


이 지역의 여자들은 시집을 가면 고향 동네의 이름을 따서 ‘떡’으로 불리지만 친정에 가면 ‘실’로 불린다. ‘실’ 앞에는 남편의 성씨를 붙이니 박 씨에게 시집가면 ‘박실이’가 되고 신 씨한테 시집가면 ‘신실이’가 된다. 그저 전해져 내려오는 호칭일 뿐이라고 하기에는 왠지 서럽다. 아이가 있어 그 이름이 석봉이라면 석봉에미라 불렸을 텐데 그것도 서럽다. 박실이 말마따나 이름 석 자는 도대체 언제 불릴까? 


방언조사를 할 때마다 친족명칭이나 호칭체계는 빼놓지 않고 조사를 하는데 여자들에 대한 호칭을 조사할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지지배’로 시작해 ‘에미나이’를 거쳐 ‘할망구’로 바뀌는 그 모든 호칭이 그렇다. ‘안까이, 낸들’은 물론 ‘아내’도 그렇다.


“화순떡, 우리 갈라요. 기분 좋은 때 다시 올라네.”

“또 떡! 떡 아니랑께.”

“그럼 뭐라 부르면 되겄소.”

“여기 있잖소. 시인 송덕봉. 큰 덕 자에 봉우리 봉 자, 내 호라 안 했소.”

“아니 강 씨 성은 얻다 내불고 송 씨 성을 줏어 왔대요. 덕봉 강삼례 부인 이리 부르면 되겄소 화순떡.”


본전도 못 건지고 물러가야 할 판인데 문 기자는 여전히 짓궂다. 본명이 삼례? 세 번 예를 갖추란 뜻으로 그리 지었나? 아버지한테, 남편한테, 자식한테 그렇게? 아버지와 남편한테는 한만 쌓였고 자식은 없으니 그 이름대로 살기는 힘들겠다. 나긋나긋하지 못한 친구 녀석 때문에 봉변을 당한 게 분해 말을 잇지 못하고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만 키워나간다.


“임 선생, 송덕봉 아나?”

“미암 유희춘 선생 부인 아닌가?”

“자네도 눈치챘구만. 오죽 한이 맺혔으면 호를 덕봉이라 짓고 성까지 바꿔 필명을 지었을까. 근데 오늘은 미안하네.”


송덕봉, 미암 유희춘의 부인이다. 시인으로도 이름이 높다.


1521년에 담양 땅에서 태어난 송덕봉, 유학자 유희춘의 부인이기도 하지만 개인 문집까지 낸 여류시인이다. 문재도 뛰어났지만 성품 또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는 이다. 당대의 분위기와 달리 남편과 대등한 관계 혹은 남편에게 더 대우받으며 살았던 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송준이니 강삼례 여사가 부러워하며 물려받고 싶을 만한 이름이다. 담양댁도, 유실이도 아닌 송덕봉이란 이름 석 자로 오늘날까지 불리고 있으니 부러울 법도 하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눙치는 친구가 얄미워 대꾸하기도 싫다. 아내는 한실이가 아닌 삶을 살고 있는가? 딸아이가 인천댁이나 실이로 불릴 일은 없겠지만 과연 호칭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그런가? 아내와 딸을 포함한 지구상의 반이 겪는 문제이다. 나머지 반과 함께 해결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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