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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연필 Sep 28. 2024

1부, 詩절인연 #5

  ― 어, 맞죠! 나 모르겠어요? 

목각 뿔테, 그녀다!

그녀의 눈이  웃자 얼굴이 따라 피었다. 활짝 핀 미소와 유사한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단단히 렉이 걸렸는지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재생 버튼을 연신 눌러도 꿈쩍을 안 했다.

 ― 신기섭 시집 얘기 들었을 때? 혹시, 설마 했는데... 어쩜 이런 일이!

 ― 맞아? 진짜 움이가 그 카페 소녀야? 나 참! 움아, 너도 이 언니 기억해?

 ― 네? 네. 아… 네.

 ― 이런 기묘한 일이 다 있어. 이야 정말 둘이 안다고? 뭐야, 둘이 왜 아는데. 움아, 넌 왜 잔뜩 언 거야? 내가 모르는 사고가 더 있어? 허, 이 녀석 봐라. 네가 말해 봐.

 '니? 니라고? 뭐지? 이 가까움은?' 

 ― 지난주에 스터디 있었잖아. 카페 갔는데 움이? 움이가 거기 있었어. 조용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우리 때문에 좀 시끄러웠을 거야. 

 나를 바라보며 싸부를 향해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그것도 반말로. 

 ― 많이 그랬죠? 서둘러 막 나가길래 불편했나 보다 했어요. 미안했었는데... 이렇게 보다니! 아 정말 신기하다!

 ― 오호 지난주라? 아이고 무단이탈하고 카페를 가셨구먼. 이러니 죄짓고 못 사는 거지. 세상이 좁다, 좁아도 이리 좁다. 

 ― 어? 그 시집?

 벼락을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카페, 목각 뿔테, 시집, 시인, 지난주부터 이 순간까지. 곳곳이 감전된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묘한 기류가 대기를 감싸고 지금 여기 나 마저 감쌌다. 대체 싸부와 목각 뿔테의 관계는 무엇이며. 지금 이 순간, 내 손에, 신기섭 시인의 시집이 들려있을 건 또 뭐람. 

 ― 저, 시집 요즘 잘 나가는 거냐? 저 시인이 우리 움이 혼을 앗아갔거든. 보통 앗아간 게 아니야!

  싸부의 가느다란 눈이 최선을 다해 원을 그렸다. 치즈처럼 쭉쭉 늘어나는 중인 싸부의 추측을 막아야 한다! 

 ― 아니, 그거 제가 제가 설명할게요. 샘 제발!

  그때였다. 목각 뿔테의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녀는 강하지만 부드럽게 나를 끌어 소파에 앉혔다. 베지밀 우유를 따 내 손에 쥐여주고는 마시라는 말 대신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어색한 구간 없이 자연스러웠다. 나를 비롯하여 내 또래들은 특히 어른이나 낯선 사람 앞에서 구간 구간 버퍼링이 밀려오기 일쑤다. 뾰족구두를 처음 신은 것처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모든 어른이 그런 건 아니지만, 싸부만 해도 그렇다. 어색할 법한 구간에서도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특유의 유머나, 제스처, 침묵마저도 적절하게 스며들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리드한다. 싸부야 뭐 어른어른이니 그렇다 치고. 이 언니는 대체 뭐지? 싸부보다 내게 가깝다면 가까울 텐데. 전혀 어색함이 없다. 그래, 그때 그 카페에서도 그랬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녀가 신기했던 게 시집에 홀릭된 것보다 먼저였지 싶다. 그녀는 내게서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다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눈동자, 입매, 손가락, 무릎의 각도에서 그녀 특유의 친절함이 강렬하게 뿜어졌다. 그렇게 '아Z트'의 공기마저 감미롭게 바뀌고 있었다.

 ― 그렇게 둘이 앉아있으니 꼭 자매 같네. 니들 오늘부터 자매 해라!

 ―  나야, 영광이지!

 ―  오케이! 자, 그러니까 수학 시간에 탈출하셔서 카페를 가셨다 이거지! 목도 축이셨으니 이제 설을 좀 풀어보셔!

 싸부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을 더 이어가려 하자 그녀가 검지를 들어 애교 있는 표정으로 사부 입을 막았다. 그리곤 나를 향해 눈동자를 주억거렸다. 하고 싶을 때, 말하고 싶을 때 하라는 듯 말이다. 목발 짚듯 그녀의 눈동자를 붙드니, 자연스레 그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무작정 걷다 보니 집이었어요. 잠이나 자야겠다 하고 누웠는데, 불안했는지 잠도 안 오더라고요. 다시 나왔어요.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인데, 교복을 입고 걸으려니. 불법을 행하는 것만 같았어요. 튀는 것도 주목받는 것도 싫어 카페로 숨어들었어요. 거기서 언니를.

 ― 아니, 같은 카페여도 이웃 손님을 어떻게 기억해? 뭔 일 있었던 건 아니고?

 안달이 난 싸부가 재촉하듯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 장난스럽게 절레절레 고갯짓했다. 딸인가? 순간 그녀가 싸부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무슨 일은 아니고요. 스터디하러 언니? 

 ― 그래, 언니 좋고!

 ― 아빠, 쫌!

 딸이 맞았다. 띵. 머리가 다시 멍해지기 시작했다.

 ― 언니가 들어왔고. 언니가 들어왔고. 

 '뭐 하는 거냐, 바보처럼. 똑같은 말을 왜 두 번이나 하는데. 아휴!'

 ― 괜찮아, 천천히 해. 물 좀 줄까?

 ― 아니요, 네, 아니 주세요.

 ― 하하하하, 야, 나 움이 이런 모습 처음이야. 와 이거 흥미진진한데!

 쏜살같이 일어난 싸부는 생수 두 병을 들고 와 당당하고, 씩씩하게 테이블에 올렸다. 자 어서 나머지 얘기를 들려달라는 듯. 찰랑이는 생수마저도 재촉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생수병을 집어 든 그녀가 뚜껑을 돌려 땄다. 그녀의 손톱 처마 끝에 끝물인 분홍 꽃물이 가랑가랑 매달려 있었다. 봉숭아 꽃물을 들인 대학생이라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녀, 갈수록 태산이었다.

 ― 제가 앉은자리 옆으로 떨어진 테이블을 붙이면 단체석이 되더라고요. 스터디 할 거라고 미리 양해를 구하셨어요. 근데 아시다시피 제가 공부를 하러 간 게 아니잖아요. 책을 펴 둔 건 의심받기 싫어 시늉만 해둔 거고요. 딱히 할 것을 찾지 못해선지, 눈과 귀가 수시로 방황했어요. 스터디 발표하는 분들 얘기에 자꾸 귀가 커지더라고요. 그런데 언니 발표를 듣고 그만 정신이 나갔어요. 신기섭 시인이라는 이름도, 시에 대한 얘기도. 모두 강렬했어요. 그래서 그러니까 제가 서둘러 나간 거는. 그 시집 때문에요. 어서 빨리 구해서 읽고 싶었거든요. 암튼 그랬어요. 절대 시끄러워서는 아니고요. 

 ― 어머, 그랬구나! 어머 세상에….

웬일로 싸부는 그윽하게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 카페에서 나와 바로 서점으로 갔어요. 대형 서점 두 곳을 전부 돌아봐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검색해서 찾아간 곳이 시집 전문, 책방이었어요. 그런데 그만 시집에 정신이 팔려서 가방도 두고. 시집도 그냥 들고 왔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가방도 책값도 다... 

 ― 잠깐잠깐잠깐, 율아 나 이제 말해도 되는 거지? 

율? 그녀의 이름이 율인가? 그녀가 깔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에 힘을 얻어 신이 난 싸부는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 그러니까, 율이 네가 발표한 시집이 신기섭 시인이 쓴, 그러니까 저 시집이고. 그 발표를 듣고 움이는 저 시집을 구하는데 정신이 팔렸고. 끝내 구한 시집을 읽느라 가방도 두고 왔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날 이미 둘은 만났다! 이거지?

  ― 음, 그렇다니깐. 몇 번을 들어야 해. 근데 좀 신기하긴 신기해. 내가 생각해도. 일반적이진 않잖아. 신기섭 시인의 시에 나처럼 끌린 이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것도 고등학생이 말이야. 아빠의 결론에 움이가 조금 특별한 아이라는 걸 보태면 조금 더 완벽하겠는 걸?

'특별하다고? 내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 시절 인연이네. 둘 말이야. 시절 인연이야! 

 ― 때시(時), 시시(詩), 모두 다네!

 ― 허허허! 그렇지! 그래 그거야 그거! 이거 참!



*     

 시절 인연, 찾아보니 말 그대로 어떤 시절에 만나지고 마는 인연을 의미했다. 선연 악연 모두를 포함하는. 엄마와 아빠가 만날 수밖에 없던 인연도, 지금 서로 다른 곳을 집이라 이르게 된 것 모두, 시절 인연의 이치인 건가? 내가 엄마 아빠의 딸로 지구에 온 것도? 그렇다면 이 모든 시절 인연을 기획하는 기획자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만날 인연은 만나진다던 말이 묘하게 나를 휘둘렀다.

 율언니가 싸부의 하나뿐인 딸이라는 걸 알게 된 그날, 싸부는 내게 희한한 처벌을 내렸다. 연필꽂이 만들기도 벤치 만들기도 아닌. 시테라피! 시테라피라는 단어에서 낯설고 질긴 질감이 느껴졌다. 이건 뭐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율언니와 싸부의 오지랖.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둘의 오지랖이 충격이었다. 오지랖도 유전인가? 유전, 물려받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무엇 무엇을 물려받은 걸까? 내밀고 꺼내기 영 민망한 것들뿐인데. 애먼 머리만 벅벅 긁었다.  영영 그닥인 내가 커질수록 싸부를 아빠로 둔 율언니가 부러워졌다. 조율. 이름도 참. 부러움이 부풀수록 어쩐지 그런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아빠에게 미안해졌다.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혼돈의 시테라피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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