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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연필 Sep 24. 2024

1부, 詩절인연 #4

*     

 크나큰 전날의 사건 앞에서 마냥 태평했던 건 아니다. 다만 시집이 더 크게 나를 사로잡았을 뿐이다. 단조로운 일상에 지친 아이들. 사고 발생일인 어제보다 후속으로 들썩일 아침을 상상했던 아이들의 기대와 달리 나는 고요했다. 시집에 들어간 나는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않았다. 기대에 부응은 않고 누가 준다 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시집을 떡하니 꺼내 든 내 꼴이 퍽 실망스러웠을 거다. 심심해진 아이들은 주춤주춤 자리로 돌아갔다. 곧이어 담임이 들어왔다. 담임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오늘 주요 일정과, 전달 사항을 짧고 굵게 전달했다. 

   좋은 하루는 누가 만든다?

   ― 내가 만든다!

 담임 표 마침 인사다. 매일 조회를 끝내며 하루를 시작하며 거는 우리만의 주문이다. '누가'와 '나'는 무리보다 개인을 지지하는 것 같아 좋다. 우르르 교실에 모여 유사한 하루를 지내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경험을 해석하고 반영한다. 외부의 자극이 내 안을 관통하여 나는 자꾸 내가 되어 간다. 학기 초  '나' 혹은 '내'를 강조한 담임의 첫인사에 크게 안도했던 기억이다. 그날 이후 저 사람의 말을 조금 잘 듣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대에 부응은 못 하고 사고를 쳤으니. 그래서일까 수학보다 담임을 보는 일이 더 찝찝했다. 시집은 잠시 덮어두었지만 마치 읽을 시가 남았다는 듯 고개를 시집 표지에 푹 처박았다. 그때였다. 나가려던 담임이 휙 뒤돌아섰다. 

   ― 움아, 오늘 1교시는 패스하자. 선생님이 윤리 선생님께 말씀드려 놨어. 아Z트 가자.

   ― 네

 정갈한 음성에서 담임스러운 방식이 느껴졌다. '아Z트'는 배송된 택배를 쌓아두는 단층 창고 옆 자투리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담임은 이곳을 목공실로 꾸몄다. 'OO아Z트'라 이름 짓고, 철문과는 사뭇 다른 질감의 나무간판을 걸어두었다. 그날 이후 그곳은 OO인 이들 모두가 주인공인 ‘OO아Z트’가 되었다. 어느덧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마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유일한 터가 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담임의 선언은 오늘의 '아Z트'가 내 차지가 될 거라는 예고가 돼주었다.

 빽빽하게 구획이 나뉜 학교에 자투리 공간이 왜 없겠냐마는, 없다. 비공개인 듯 보이나 다 까발려진. 막아주는 벽처럼 보이나 가로막는 벽으로 가득한. 그런 곳이 학교다. 그렇다 보니 빼빼로처럼 다닥다닥 붙어 앉은 교무실에서의 개별 상담은 공개된 비밀 상담이나 마찬가지다. 상담실이 있지 않냐고? 물론 있다. 다만 AI처럼 잘 교련된 상담 샘이 머무는 상담실을 자주 드나든다는 건, 문제 있는 아이라는 주홍 글씨를 스스로 박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다수가 머무는 공간은 불필요한 구설수를 쉬지 않고 생산해 낸다. 정말 딱 질색이다. 

관심과 오지랖은, 받는 이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덜떨어진 종족들은 '주는 이' 되어 충실하게 주접을 떤다. 하루 종일 그러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침묵하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린 이들처럼 말이다.      

 와중에 담임은 달랐다. 보이지 않는 공기가 어디로 흐르는지 감지했다. 적성이 아닌지라, 과감한 표현은 늘 미뤄두는 나지만. 담임을 떠올리면, 특별한 어른이자 선생님이란 말로는 부족한 큰 존재로 느껴졌다. 그렇게 담임은 ‘아Z트’라 명명한 이곳을 제2의 교실로 만들었다. 또래보다 유독 덩치가 커 놀림받는 유석이를 데려가 체력단련을 시켰다. 말 그대로 알파 교시 체육인 셈이다. 6개월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석 아Z트'에서 알파 교시를 보낸 유석이는 살이 빠지다 못해 수척해졌고. 오랜만에 본 녀석의 턱은 곱게 빚어낸 도자기처럼 매끄러웠다. 때마침 훌쩍 자란 키는 녀석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어떻게든 피하려던 아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려는 여자아이들만이 유석이 거니는 복도에 매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여전히 말수가 적었다. 유석 효과 때문일까? 자연스레 ‘아Z트’입성을 노리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담임은 나름의 기준이 명확했다. 내겐 그 기준이 ‘절실함’ 정도쯤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높다란 ‘아Z트’의 문턱을 수학 덕에 가뿐히 넘었다. 세상은 참 아이러니다. 수학은 아랑곳하게 만들지 못할 테지만, 다만 그로 인해 곤란했을 담임이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담임이 욕먹을 일은 아니라서. 그럼에도 성실하게 지랄했을 수학이 보여서. 그게 천불이 났다. 



 ‘왜 그랬냐?’ 물으면 ‘왜 그랬노라’ 답할 생각으로 순순히 담임 뒤를 따랐다.       

 ― 이리 와 앉아, 무슨 죄지었어? 아니다 너 죄지었다. 푸하하     

 담음은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웃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면 좋은 속이 훤히 보이는 것 같다. 고만 좀 웃으시라. 가끔 심부름으로 다녀갔지만, 이 공간을 이렇게 본 건 처음이다. 다용도 알파 교실 '아Z트'는 어떤 용도로도 쓰이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양. 나날이 진화했다. 소파도 커튼도 드리웠고, 공중엔 완성과 미완성의 경계에 머문 자작나무들로 향이 더해졌다. '아Z트'는 괴짜들이 모여들 법한 아늑한 기지로서의 면모를 힘껏 뽐내고 있었다.      

 ― 선생님 꽤 섬세해요. 늘 의외지만.

 ― 야, 어디가 의외야. 내가 머털도사처럼 생겼다고 속까지 그럴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야 오산! 

 ― 아∼ 예예!

 ― 모닝커피 마시자. 이 싸부가 원두를 기가 막히게 볶아왔지. 움이 커피 마시지? 

 ― 네, 좋아요.

 ― 글은 좀 써? 시 어때? 시?

 학기 초, 국어 수행으로 써낸 작문을 본 후로 담임은 뜬금없이 시를 쓰라고 채근했다. 그래서 시라는 단어가 들렸나? 아닐 거다. 몇 줄 안 되는 작문 수행인 걸, 대체 뭘 보고. 그런 '뜬금없음'은 그저 나와 관심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슈 중 하나일 것이다. 다정한 담임이 연구해 낸 담임만의 그것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성실한 채근임은 틀림없다. 더 받고 싶어 더 튕기고 마는.      

 봉지에서 탈출한 커피는 거침없이 제 향을 뽐냈다. 곱게 갈린 원두 알갱이 위로 물줄기가 닿을 적마다 커피는 속을 비웠다. 비울수록 갈빛의 향과 맛은 차올랐다.

 ― 내일부터 이주 간 이곳에서 방과 후 한다 생각해.

담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코를 찡긋 거렸다. 

 ― 처벌인 거죠? 

 ― 그러니까 처음 선생이 되었는데. 여름이 막 피어오르던 날이었지. 5층 교실에서 운동장을 보며 멍 때리고 있는데.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이 쪼그려 앉아 원을 그리고 있는 거야. 캬, 한 떨기 꽃송이처럼 얼마나 예쁘던지. 그 사이로 선배 교사 목소리가 찌릿 울리는데, 낭만에 쫙 금이 갔어. 글쎄 아이들이 벌을 받고 있었던 거야. 그런 줄도 모르고. 꽃송이를 떠올렸다. 내가. 참 나, 그때 말이지. 세상에 벌이 되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어. 특히 쪼그려 앉기 같은. 골목에 쪼그려 앉은 아이들을 떠올려봐. 상상만 해도 얼마나 진취적이냐. 웅크려 있지만 어디로 어떻게 필지 모르는 미래잖아. 땅과 땅으로 피어나는 것들과 가장 짧은 거리에서 눈 맞출 수 있는 귀한 포즈인데. 이게 내 나이 되면 배가 나와 그렇게 앉기도 쉽지 않아요. 귀엽지도 않고. 그러니 그런 동심의 서정이 추억으로 남아야지 체벌로 남으면 되겠냐? 이거야. 하여 그날 이후로 나는 진보적인 조금 체벌다운 체벌이 없을까에 대해 몰입했지. 

 ― 성공하셨어요?

 ― 아Z트, 이곳이 연구의 성과인 거지. 음하하. 체벌의 전환을 꾀하는 곳. 무한대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곳. 마음 누일 수 있는 곳. 상처를 예술로 피워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거지. 어때?

 ― 선생님, 학교에 친구 없죠?

 ― 인석아, 싸부가 왜 친구가 없어? 니들이 내 친구지. 하하. 

 ― 그래서 목공이 체벌이 되긴 해요?

 ― 하모! 죄질의 강도에 따라 다른걸. 대다수는 가벼운 목공 소품 만드는 작업이 주야. 으르렁하는 녀석들 마주 앉혀놓고 연필꽂이를 열 개씩 만드는 거야. 이게 단순노동을 하면 생각도 가지치기되거든. 나중에는 지들이 왜 다퉜는지도 잊어. 그렇게 만든 연필꽂이 들고 지역아동센터 찾아가 나눠주면 끌려 와 억울했던 마음이 묘한 보람으로 들어차지. 야야, 말도 마. 또 찾아와. 저희 또 싸우면 만들 수 있어요? 하고 말이야. 한 번은 왜 움이도 기억하지? 우리 학교의 자랑, 일진들의 패싸움.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녔지. 그렇게 경찰서까지  넘나 든 대단한 사건에는 나무가 곱절로 많이 들지. 그때 만든 게 벤치 네 개, 평상 두 개지 아마? 싸우기 안성맞춤인 골목에 녀석들이 만든 벤치를 가져다 놓았어. 화초도 심고 알전구도 걸어놓고 말이야. 평상은 인근 노인정 마당, 마을 카페 정원에 가져다 두었고. 만들면 끝이냐. 정비는 필수지. 의자마다 담당을 배치했어. 웬만한 어른보다 성실해. 왜냐, 지들이 만들었거든. 난 가끔 산책하면서 의자에 앉은 사람들 카메라에 담아 오고. 저기 걸린 사진이 그거야.       

 엉뚱한데 묘하게 끌렸다. 회초리, 엄한 표정 없이도 담임은 선생님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Z트’의 오색 계절은 담임이 만들어낸 노력의 모양이었구나.

 ― 저도 연필꽂이 만들면 되나요? 

 ― 수학 샘하고 마주 앉아 만들까?

쩝- 순간, 말이 길을 잃었다. 

피식 웃다 말고 일어선 담임이 캐비닛에서 꺼내든 건 내 가방이었다. 헉, 가방이 대체 왜 이곳에 있단 말이냐.

 ― 연필꽂이로 되겠어? 책 도둑도 도둑인걸. 

 ― 책 도둑요? 아!

어젯밤 잊은 건 가방만이 아니었다. 시집의 값을 지불하지 않았으니 온전한 내 집이 아닌데. 마치 내 집인 양 들고 왔으니 말이다. 순간 쭈뼛 소름이 돋았다. 

 ― 시집! 아, 선생님 어떡해요? 근데 가방은? 

 ― ‘가방을 두고 갈 정도로 시집에 정신이 팔렸나 봐요.’ 쯤으로 서점 주인이 해석해 줬으니 망정이지. 까딱하면 절도까지 얹을 뻔했어. 반항에, 무단이탈에 싸부 전화 깔끔하게 무시한 것까지 얹으면. 어디 목조주택 한 채 정도는 지어야지 않겠어?

 ― 죄송해요. 수학 샘 건은….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 그래, 그래도 그건 잘못한 거야. 수학 점수가 낮아도 사람일 수 있다는 걸 너의 가치로 보여줘야지. 왜 설거짓거리도 살살 불려둬야 잘 닦이잖아. 감정도 마찬가지야. 힘 들어가고 굳어버린 감정을 깔끔하게 전달하기란 어려워. 그럴 땐 감정을 미지근한 마음에 불려두는 거야. 그럼 다시 전할 때 힘도 덜 들어가고 편히 풀리거든. 무엇보다 별일 아닌 일이 되기도 하고.      

 ‘불려두기를 잘할 나이는 아니잖아요.’라 말하고 싶었지만 불려두기로 했다. 담임 아니 싸부의 말이 옳았다. 내가 무장 무장 수학 샘을 견디고 있었음을 알리 없는 담임이 꽤 당혹스러웠을 마음도 알 것만 같았고. 그래도 수학같은 부류의 인간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 미수에 그쳤지만. 그래도 대단한 사고를 친 거나 다를 바 없으니. 내일부터 종례 후 이리 오는 거야. 일단 보름. 

 ― 네     



*     

 ― 저기…….

 ― 나?

 ― 그거 내 담배 아니었어. 너 말대로 정말 우리 형 옷이었거든. 

 ― 그래? 그래.

 ― 오해 안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미안하고 고마워. 꼭 말하고 싶었어.

 ― 그래.

 ― 집으로 가니?

 ― 아니, 아Z트.

 ― 아, 나 땜에…….

 ― 너 때문 아니야. 그리고 좋아, 난.

 ― 아, 미안해.

 ― 뭐가 그렇게 미안해. 신경 쓰지 마.

 ― 난, 가빈이야. 전가빈. 넌 움이지? 설움.

 ― 가빈? 그래, 기억할게.

 ― 저기…

 ― 응?

 ― 아니야, 잘 가… 움아.     

 자신을 가빈이라 소개한 아이는 두어 걸음 떨어져 뒤따랐다. 그리곤 ‘아Z트’로 들어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Z트’ 창에 멍하니 박힌 가빈의 표정이 가슴에 확 박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아Z트’엔 싸부가 아닌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문소리에 돌아본 그녀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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