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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연필 Sep 14. 2024

1부, 詩절인연 #3

*     

 '아이씨, 뭐라고 해.'

 실은 수학보다 담임을 볼게 더 걱정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실수나 잘못을 들키고 싶지 않은 존재가 생겼달까. 담임은 그런 사람이다. 쪽팔리고 후지기만 한 나를 볼 때마다 퍽퍽 들쑤신다. 그러곤 내 구석에 구겨진 채로 버려진 나를 스윽 꺼낸다. 후- 묻은 먼지를 털고, 구겨진 나를 쫙쫙 펴 돌려준다. 처음엔 그런 나를 마주하는 게 낯설고 불쾌했다. 하지만 담임과 얘기하고 나면 저릿하던 심장이 자꾸만 순해졌다.

 이럴 땐 문자를 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어쩌면 담임은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차마 문자에 담길 수 없는 내 사정을. 그런 까닭에 담임의 문자조차 열어보지 않고 있음을. 개똥 같은 합리화인 거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야 한다. 죄송해도 어쩔 수 없다. 시집이 급하다.

 '선생님, 쏘리.'


 지도맵을 띄웠다. 맵 지도는 참 친절하다. 일러준 대로만 가면 된다. 고분고분 따르는 건 맵이 건네는 말이 유일하다. 오늘도 맵은 친절했다. 일러준 목적지에 도착하니 떡하니 서점이 버티고 있다. 위아래 모두 책방인데 서로 이름이 달랐다. 조금 이상한 표현이지만, 1층은 서점 같고 2층은 책방 같달까? 암튼 외관에서부터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시집 전문 서점은 2층이다. 조빗한 계단을 따라 올랐다. 벽에 오밀조밀 붙은 포스터는 책방을 더욱 책방답게 돋구었다. 문을 밀고 시집으로 흘러들었다. 각자 혹은 서넛이 눈으로 입으로 시를 읽는다. 온통 시에 홀렸는지 들어가는 인기척에도 끄떡없었다. 천만다행이다. 그것만으로도 첫인상은 대만족. 어쩌면 이곳에서 저들처럼 내가 찾는 시를, 시인을 만날지도 모르겠다는 확신이 묘하게 피어올랐다.     


 그 큰 서점에서는 하숙 들어 지내더니, 이 서점에서는 제 세상을 만난 듯했다. 작고 아담한 시집 특유의 무늬가 책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채웠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시인이 있다니. 이렇게 많은 시를 쓴다니. 놀랍고 기괴했다. 처음 접하는 풍경 앞에서 나는 둥둥 떠 올랐다. 강렬한 눈맞춤에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었다. 나를 이곳까지 이끈 힘은 뭘까? 난데없고 뜬금없기는. 제어해도 소용없다. 생각은 이미 나를 추월해 폭주하고 있었다. 카페, 무리, 뿔테 안경, 아니 그보다 수학, 도발, 탈출이 먼저지. 그나저나 오늘의 도미노 게임, 그 시작도 시작이지만 난 이 도미노가 어디서 멈출지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어쩌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만 같달까. 평소에는 신도림역 2번 출구 사물함 7번 칸 어디쯤 숨어 있다 '짠' 하고 나타나는 건 아닌지. 그때였다. 흐느낌! 세 글자가 눈에 확 박혔다. 가까이 가 보니 '분홍색 흐느낌!' 여섯 글자가 똘똘하게 딱 박혀있다. 얼른 책을 뽑아 들었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봤다. 범벅이 된 기쁨과 반가움에 머릿속 회로가 뜨끈했다.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서점 주인으로 보이는 듯한 사내다. 느낌표처럼 매꼬롬하게 생긴 사내는 과하지 않은 미소를 건네고는 건너편 테이블을 가리켰다. 앉아서 편히 보라는 사내의 고요한 친절마저도 시처럼 보였다. 난 시를 좋아한 적이 없다. 특히 교과서 속 시는 마주하면 현기증부터 났다. 그런 내가 시라니. '분홍색 흐느낌'이 꼭 주사 같았다. 한 대 맞았을 뿐인데. 이 가눌 수 없는 약 기운 이라니.  


 사내에게 가볍게 목례로 답하고 일러준 테이블에 가 앉았다. 시집을 펼치려는데 옆자리 의자를 뺀 사내가 내 가방을 쓱 올려놓는다. 바닥에 둔 가방마저 잊었다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사내는 저만치 제 자리로 흘러갔다. 가위에 눌려 몸과 의지가 따로 노는 것만 같았다. 몽롱 몽몽롱.    

 드디어, 신기섭 시인의 집으로 입장.
 



*     

‘개가 비를 맞으며 운동장 한복판에 앉아 있다 물방울 털어대는 새파란 상추 같은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개는 털이 빠져 군데군데 드러난 살결마다 물감처럼 흉터가 굳어 있다 빗줄기에 뜯겨도 흉터로 아문 상처는 이제 아프지 않은 아픔이라 개는 사타구니에 난 흉터를 핥고 있다 입을 벌리고 헛구역지도 하고 있다 제 몸의 흉터처럼 군데군데 일그러진 운동장의 흙탕물들까지 개는 일어나 핥고 있다’     


‘물감처럼 흉터가 굳어 있다 빗줄기에 뜯겨도 흉터로 아문 상처는 이제 아프지 않은 아픔이라’ 3행의 문장에 느리게 줄을 그었다. ‘아물면 아프지 정녕 아프지 않을까? 흉터로 아문 상처는 아픔 너머의 상처라는 말인가?’ 가로등 그림자 아빠가, 밤과 낮이 바뀌어 머리까지 이불 덮고 잠든 엄마가 떠올랐다. 눈이 거칠게 내리던 그 겨울밤도.

      

‘울지 않으면 죽는다. 세상에 나올 때 나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나를 때렸다고 한다 오늘은 보답하듯 나도 그녀의 가슴을 때렸지만’      
할머니 새끼, 엄마들, 만남, 안 잊히는 일, 우리집에서나가주세요, 꿈, 문학소년,의 시들과 ‘늙게 살면 빨리 죽는 거야 희망을 말하면 빨리 죽는 거야’

 넋 놓고 빠져들었다.


 '쿵' 소리에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드니 떨어진 책을 주워 든 여자가 막 문을 나선다. 서점 문은 여자가 남기고 간 잔열 같은 그리움으로 찰랑거렸다. 창밖으로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연극이 끝난 무대처럼 모두 사라지고 나만 남았다. 주인 사내마저도. 덜컥 불안이 엄습했다. 11시 35분, 설마. 몇 번을 봐도 같았다. 35에서 36분으로 넘어가던 찰나 불현듯 불안의 출처가 떠올랐다.

'막차!'

 단숨에 2층을 빠져나와 까만 밤의 도시로 입장했다. 제대로 소외된 덕에 폰의 배터리는 세 칸이나 남아있었다. 지하철역을 향해 달렸다. 텅 빈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면 길을 지나는 아무의 손이라도 빌려 잡고 싶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허전할 겨를 없이 시집이 손을 꽉 붙들었다.


― 움아 일어나. 너 어떻게 된 거야?

― 별거 아니야, 이따 학교 다녀와서 얘기해.

― 아침 먹고 가. 시리얼이라도.

― 아냐, 늦었어. 엄마, 가방 못 봤어?

― 책상 아래 없어?

― 아이, 없잖...


'앗!'

그제야 생각 났다. 

간밤, 가방은 나와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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