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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연필 Oct 15. 2024

3부, 詩가 된 움의 가시 1

*     

 율이 언니 등 뒤로 터널이 일렁였다. 어둔 터널이 앞이 아닌 뒤에 놓여 다행이다 싶었다. '휴' 하며 숨을 크게 고르자 언니의 낯빛이 한결 밝아진 듯했다. 깃든 어둠을 길어내야 하는 까닭을 만난 기분이랄까. 맑고 밝은 내게 이르기 위해서는 길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그 곁에서 탁해진 내게도 가벼이 밝은 날이 와줄까? 그런 날을 상상했지만, 그려지지 않았다. 상상했던 기대가 세밀하게 그려지지 않자, 씁쓸해졌다. 어둠을 한 입 빨아 마신 듯, 이내 내 안에 무거운 어둠이 한 자락 깔렸다.

 ― 너무 무겁지? 

 ― 이제는 가벼워졌잖아요. 다행이에요.

 ― 가벼워질 수 있어. 누구든. 시간이 그렇게 만들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의 힘을 난 믿어.

 ― 선생님이 많이 달라진 거죠?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우리 사이도 그렇고.

 ― 너무 달라요. 상상이 잘….

 ― 그럴 거야. 어쩌면 나도 아빠도 엄마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우리 누구나 오만가지 자아를 갖고 있잖아. 엄마의 빈자리에 집중하는 사이, 차라리 엄마가 되어버렸는지도. 

 누군가를 그토록 그리워한 적이 있던가. 그리하여 차라리 그 누군가가 되어버린 적이 있던가. 어쩌면 그런 감정은 율 언니처럼 따뜻한 이에게 허락된 감정일지도 모른다. 우리 둘은 온탕과 냉탕처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슬픔과 상실을 따습게 품어 안을 주제도 못 되는데, 어쩌나. 

 ― 언니는 좀 달라요.

 ― 달라? 

 ― 저는 그냥 꼬였나 봐요. 다 마음에 안 들고. 모든 게 다 이해 불가고. 봄, 햇살, 나무처럼 살아나는 단어들과 거리가 먼….

 ― 사건 사고의 현장 안에서는 모두 당황하지. 뜨겁던 그 시절이 과거형이 되면 당황도 식더라. 내가 고작 이런 인간인가 싶은 생각에 자존감에 금이 얼마나 간 줄 알아? 엄마 따라가겠다고, 아빠한테 못되게 군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아내 잃은 아빠의 슬픔 따위는 내게 안중에도 없었어. 나만 힘들다고 징징거렸지. 지금이니까 이렇게 말하지. 아빠가 나가 따로 살라 했으면 어쩔 뻔했어. 

 ― 어떤 과거는 여전히 현재기도 해요. 제게 과거는 그래요. 엉망이 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래서 내일에 대한 기대도 없어요. 

 어쩐지 내 과거를 언니가 궁금해해 주길 바랐다. 마법처럼 언니 앞에 쏟아 내면, 나의 과거가 진짜 과거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부풀었다. 그리로 숨어있던 또 다른 자아가 거세게 초를 쳐댔다. 부푼 기대를 싹둑싹둑 잘라내는 통에, 고개 내민 용기가 쏙 숨어버렸다. 오기가 났다. 이대로 갉아 먹힐 수는 없잖은가. 언니를 붙들고라도 난 이 터널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 이상한 이사를 했어요. 작년에.


 

*

 이곳으로 끌려왔다. 내 마음과는 별개로 몸만 왔으니 끌려왔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평범했던 저녁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몸이 먼저 안다. 몸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좋음의 감정이 스멀스멀 튀어나와 들키곤 한다. 아빠는 어깨에 숨겨두었다. 숨바꼭질을 가장 못 하는 어깨 덕에 번번이 아빠는 기분을 들켰다. 그런 어깨라도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아빠는 눈을 좋아한다. 눈이 오는 날 유독 어깨의 출렁임이 커진다. 하지만 감정의 꼬리가 원체 길지 않아, 그 세밀한 변화를 일반 사람들이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한다.  

무언가를 기억하기 시작하던 무렵, 엄마는 별책부록처럼 아빠에 대해 설명했다. 고아로 자란 아빠에 대해서 말이다. 홀로 자란 아빠라서 아빠 노릇을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 뛸 뜻이 기뻤던 감정을 느껴보지 못해 어려 자랐어야 하는데, 자라지 못한 기쁨이라는 감정에 대하여. 어린 내게 왜 그런 얘기를 꼬박꼬박 박음질하듯 들려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습관처럼 틀어 둔 라디오처럼 듣고 또 들었다. 십 대가 무르익을 무렵 박음질처럼 들려준 엄마의 말이 내게 하는 말이 아닌, 엄마에게 들려주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버티려고, 살려고 엄마 자신에게 건넨.


 소리도 없이 오래오래 눈이 내려앉았던 겨울. 라디오에서도 눈 얘기 일색이다. 

‘올해 첫눈인 거죠? 집으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지만 지금은 눈을 만끽하고 싶네요. 

‘IOS : 이틀 전에 내린 싸락눈이 첫눈인 것 같은데요?’

‘아하하, IOS님, 이틀 전에 첫눈이 왔군요! 뭐 어떻습니까? 오늘 내리고 있는 눈 역시 오늘이 처음일 테니. 지상에 내려서는 것 또한 처음일 테죠. 그러니 우리 그냥 다 첫눈이라 해주자고요. EXO의 '첫눈' 오늘 첫 곡입니다.’     

‘이번 정류장은 은빛 언덕입니다.―’

 은빛 언덕 꼭대기 한 동짜리 작은 은빛 아파트 사 층 이 호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 우리 세 가족이 머무는 집이다. 십 오 년 전 엄마 아빠가 터를 잡은 집. 나와 나이가 같다. 열여섯. 아파트 입구 은빛 언덕에는 오래된 구멍가게가 있다. 언덕 상회. 아랫마을 큰 도로를 따라 대형 마트가 한둘 자리를 잡았지만, 동네 구멍가게만이 연출하는 특별한 기능이 있다. 즉흥적인 마음을 불러내는 묘한 힘을 지닌 언덕 상회는 마을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발길을 꼭 붙든다. 원 플러스 원 행사도 모르는 상회지만 사람들은 막걸리 한 병, 담배 한 보루, 에이스 한 개,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나온다. 그럴 때면 하루의 마침표가 동동 떠가는 검정봉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상회를 빠져나온 물건들은 터덜터덜 새 주인의 손에 이끌려 은빛의 집으로 깃들었다. 여덟 시가 넘으면 두부와 콩나물은 어김없이 동이 났다. 귀신같이 물량을 헤아려 주문하는 상회 할머니의 오랜 연륜이 빛을 발하는 찰나다. 눈이 오는 날이면 6학년 겨울밤, 상회 앞 평상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땐 아빠도 초코파이 같았는데. 그날도 첫눈이 내렸더랬다.

 ― 아빠! 뭐 해?

 ― 아니… 그게 저.

 ― 눈 구경하는구나! 나도 나도

아빠 곁에 덥석 앉았다. 흰 눈을 보니, 엉뚱하게 까만 초코파이가 떠올랐다.

 ― 아빠 나 초코파이!

아빠는 준비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아빠의 동전을 냉큼 집어 상회로 달려 들어갔다. 

 ― 할머니 이거요!

 초코파이를 집어 들고나와 아빠 날름 아빠 곁에 걸터앉았다.

 ― 뭐가 이리 급해 거스름돈도 안 받아 들고.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구먼~!”

서두르느라 거스름돈을 잊고 나왔더니 할머니가 쫓아 나왔다. 뭐, 안 받아도 크게 상관없다. 워낙 잘 아는 사이니 굳이 내가 받아오지 않아도 알아 쓰일 터다. 이틀 내로 엄마는 콩나물을 살 것이고. 틀림없는 할머니는 자초지종을 설명할 테니. 어쩌면 그런 이야깃거리가 상회의 하루, 할머니의 일상을 채우는 소소한 기쁨일지도. 앗,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엄마가 오늘의 현장을 알게 되면 조금 복잡해진다. 배고프면 집에 와서 간식을 먹지 뭐 한다고 길에서 초코파이를 먹고 다니냐, 기지배가 덜렁거려 어디에 쓸 거냐, 온갖 거냐 거냐 거냐가 밤과 내 감정을 홀라당 지배해 버릴 게 뻔했다. 그러니 평상에서 거스름돈을 받게 된 건 천만다행인 셈이다. 할머니에겐 조금 싱거운 사건일 테지만 이래야 깔끔하다. 부푼 상상에 초코파이 하나를 곁들여 먹는 동안 아빠는 눈에서 눈을 못 떼었다.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는데 눈치 없는 초코파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초코가 묻은 손가락을 쪽 빨았다. 아빠는 슬그머니 상회로 들어가, 초코파이를 더 사 들고 나왔다. 두 개였다. 우리는 초코파이를 하나씩 나눠 가졌다. 아빠와 함께 먹으니 더 맛있는 건 기분 탓일까. 동그란 초코파이가 둘을 하나로 엮어주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눈'이라는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처럼 나란히 앉아, 방해되지 않게 초코파이를 녹여 삼켰다. 

 ― 더 먹을 수 있겠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먹을 일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초코파이의 원에 오래 갇히고 싶었다. 아빠는 초코파이 한 개를 들고나왔다. 아빠 뒤로 할머니가 따라 나왔다. 

 ― 그렇게 하나씩 살 거면 한 박스를 살 것이지.

 ― 이게… 이렇게 먹어야 맛이…

 ― 하긴 그건 또 그래. 더미로 있으면 하나 귀한 줄 모르지. 하나일 때 그 맛이 있어. 

아빠 말에 설득된 할머니는 눈 내리는 하늘을 슥 올려다보곤 이내 가게로 쏙 들어갔다. 까만 달을 뱃속에 품은 체, 내리는 눈과 오래 눈 맞췄다.      

 ― 먹는 게 왜들 그래?

 ― 어… 저기 입맛이

 ― 속 안 좋아요?

 ― 아니

 ― 움이 넌? 넌 왜 안 먹는데!

 ― 아니 

 ― 뭐가 아니야. 이거 이거. 솔직히 말해. 둘이 같이 들어왔잖아. 자수하시지.

엄마들은 엄마가 되는 순간 신형 레이다를 장착이라도 하는지. 촉이 보통이 아니다. 안 봐도 본 것처럼 안 들어도 들은 것처럼 나의 세상을 지배해 버린다. 오늘은 좀 모른 척해줘도 좋을 텐데. 기어이 들춰내려고 안달이다. 

 ― 아니… 눈이, 그래서 상회 앞에서. 

 ― 아, 초코파이 먹었다, 그래! 밥 먹을게. 

 ― 몇 개? 몇 개를 먹었길래.

 ― 한 개!

 ― 세 개…

 손도 발도 마음도 이렇게 엇박자일 수는 없지. 한 개를 외친 나와, 세 개를 외친 아빠 중 누가 봐도 세 개 승이다. 오마이 갓. 다행히 엄마는 악마로 변하지 않았다. 얼른 씻으라는 말속에 가시는 있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밥 먹는 엄마 곁으로 아빠는 소주 한 병을 꺼내 와 저녁을 이어갔다. 나는 어쩐지 아빠와 첫눈이라는 비밀번호를 나눠 쥔 것만 같아 씻는 내내 웃음이 거품처럼 피어났다. 지나고 보니 그날 오래도록 눈 내리는 걸 보았던 것보다 아빠랑 나란히 앉아 있던 그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아빠를 옆에 붙들어 앉힐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눈의 힘이었지만 말이다.      


 ― 움아, 너 가게 할머니가 착하다고 칭찬하시더라.

 ― 왜?

 ― 아빠 옆에 앉아 있어 주는 딸이 어디 있냐고.

 ― 엄마는 아빠 왜 좋아했어?

 ― 그런 질문이 어딨어?

 ― 아빤 말이 없잖아. 그럼 무슨 생각하는지 잘 모르지 않나? 

 ― 아빠 표정이 가여웠어. 눈가에 주름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그땐.

 ― 그땐? 

 ― 알잖아. 돌부처. 꼼짝 안 하는. 힘이 달려 점점.

 백 번은 족히 들은 얘기지만 실은 그 감정을 잘 모르겠어서 나는 자라는 내내 물었던 것 같다. 그러면 엄마는 또 처음 들은 질문이라는 듯 상세하게 설명해주곤 했다. 그럴 때면 별난 취향인 엄마 눈동자에서 반짝 빛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로 서서히 바래갔다. 아빠에 대한 말을 할 때면 줄 끊어진 기타처럼 연주가 식었다. 어쩌지 못하는 나는 어슬렁 길고양이가 되어 엄마 곁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여름. 방학과 휴가를 겸해 외갓집과의 여행 얘기가 오갔다. 때마침 이모라는 친숙한 존재 곁에 이모부라 불리게 될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예비 이모부인 셈이다. 가을 결혼을 앞둔 이모와 우리 가족이 될 이모부와 경사 겸사, 말이다. 외갓집 식구와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떠나는 첫 여행이기도 했다. 퇴근이 늦은 엄마와 아빠는 후발대로. 나는 할아버지 차에 탑승. 선발대로 나섰다. 선발대는 펜션 인근 관광지를 구경하기로 계획을 세웠고, 가이드는 예비 이모부가 도맡았다.     

 ― 엄마, 움이 아빠한테 나 기다리는 동안 장 보라고 할게. 구경하고 숙소에서 만나요.  

 ― 얘, 우리가 봐도 되는데.

 ― 아니야, 날도 더운데. 여행하셔. 

 그러니까 얼결에 후발대 멤버인 아빠가 장을 보게 되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나누는 통화 내용을 들으며 찜찜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어른인 아빠를 내가 믿지 못하는 게 어딘가 미안하고 또 이상한 것 같았다. 미안함과 찜찜함을 보이지 않게 꽁꽁 숨겨두었다.

 ― 엄마? 오고 있지? 도착하면 고기 굽는다고 이모부가 불 피우고 계셔. 어디쯤이야?

  엄마는 말이 없었다. 불안했다. 아니 그냥 그런 기분이 든 걸 거라, 나를 안심시켰다.

 ― 할머니 좀…….

 전화 받는 할머니 낯빛의 채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걱정 말라고, 조심히 오라고. 여기서 알아서 하겠노라고. 할머니는 할머니 딸을 안심시켰다. 통화를 마친 할머니는 불 피우는 이모부와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복잡하고 난해한 할머니 발자국 자국마다 선우 선우 우리 선우가 찍히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찍은 걱정 자국이 할아버지한테로 길게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할머니 수신호를 보고 숙소로 들어간 할아버지는 작전 지령을 받은 전투사의 모습으로 차키를 들고나왔다. 

 ― 아버님, 어디 가시게요? 

 ― 아, 이거 내가 이 근처 고기가 맛나다고 들어서, 여기서 고기 사겠다 하고는 잊었지, 뭐야. 나이 드니 이런다니깐.

 ― 제가 갈게요. 제가 가요, 아버님.

 ― 아니야, 자넨 불 피우고 있어. 곧 움이네도 올 테니, 여기서 맞이해 주게나. 움아, 우리 움이 과자 사다 줄까? 아니다, 우리 움이가 할아버지 짝꿍 해라.

 말없이 할아버지 뒤를 따랐다. 긴박하나 느긋하게 시동을 걸고 펜션을 빠져나왔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할머니와 이모는 복잡함이 버무려진 표정으로 사라지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에 들린 캔 맥주와 밑반찬에 이모부가 잘 속아주기를 바랐다. 

 ― 할아버지 고기 안 샀대요?

 할아버지는 멋쩍게 웃었다. 내비게이션으로 30분, 왕복 한 시간이다. 아빠가 길을 잘못 들어 시간 반이면 도착할 거리를 두 시간 반이 걸리도록 도착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 또한 이모부한테는 출발이 늦어진 걸로 정리되는 것 같았다. 아빠는 내비게이션을 불신한다. 상황에 따라 다르고, 변수가 있을 수 있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오래전 목적지를 다른 곳으로 안내받은 경험 이후 내비게이션은 침묵해야 했다. 목적지의 번지수 숫자를 잘못 검색했기 때문이라는 엄마의 얘기는 아빠의 귀 앞에서 번번이 튕겨 나갔다. 그럴 때면 영락없는 시멘트다. 발자국이 생기면 생긴 자국대로 굳어지는, 뾰족한 충격에 사정없이 금이 가고 마는 그런 볼품없는 땅.      

 달려간 곳은 시골 읍내 마트였다. 아홉 시 마감을 십 분 앞두고 간신히 도착했다. 마감을 서두른 주차장은 깜깜했다. 대는 둥 마는 둥 차를 던지고 달려 들어간 마트. 썰렁한 공기가 훅 밀려왔다. 계산대를 막 껐는지 다시 켜는 점원의 작동음이 거칠었다. 정육 코너를 향해 할아버지는 내 달렸다. 냉장실을 제외하고 정육점 안도 불이 꺼져 있었다. 직원을 찾으려는 그때, 정육점 창고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나왔다. 벽돌만 한 손가방을 옆구리에 낀 사내는 범죄 영화 속 조연으로 나올법한 분위기였다. 

 ― 저, 정말 죄송한데, 고기 세 근만 사 갈 수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가족들이랑 여행을 왔는데, 제가 그만 깜박하고.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험상궂은 덩치 때문인지 어쩐지 나는 고기 사 들고 가기는 글렀구나 싶었다. 멀끔하게 갈아입은 일상복이 오늘 더는 칼 잡을 일 없음을 앙다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 세 근요? 여행 오셨는데 고기 안 드시고 가면 낭패죠. 고기 없는 여행이라, 그건 앙꼬 없는 찐빵이고 고무줄 없는 빤스 뭐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어르신 다른 거 장 볼 거 없으셔요? 슈퍼 마감 할 시간이니 다른 것부터 고르셔요. 제가 영수증 먼저 내드릴게요. 참, 숯불에 구울 거죠? 가만있어 보자, 도톰한 고기는 안에서 가져와야 해요. 마침 맛있는 놈이 있어요. 고기도 인연이 있어요, 가만 보면. 하하하     

‘뭐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할아버지가 휘청했다. 

 ― 할아버지 괜찮아?

 ― 어르신 더 살 거 없으면 여기 잠깐 들어와 앉으셔요. 

정육점 주인은 비타 오백 두 개를 꺼내 돌려 깠다. 

 ― 그래, 사장님 이 일은 오래 하셨어요?

 ― 근데, 저 어르신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할아버지 전화벨이 울렸다. 할아버진 울리는 전화를 내게 건네고 대화를 이어갔다. 늦은 시간 퇴근을 미루고 고기를 내어 준 정육점 사장님께 마음의 예의를 다 하고 싶었을 거다. 우리 할아버지라면 말이다. 걸려 온 전화는 할머니였다. 상황을 볼 수 없어 조마조마한 할머니는 내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물었다.     

 ― 고기는!

 ― 할머니 지금 담고 있어. 엄마는?

 ― 조금 전에 도착해서 마당에 있어. 그래, 조심히 와. 할아버지 운전 조심하시라 하고.

 ― 네!

 ― 움이가 따라가길 잘했지, 뭐야.     

아직 끊어지지 않은 전화 속에서 남은 할머니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     

 ― 아버님 오셨어요? 저 때문

 할아버지는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로 아빠 말꼬리를 티 안 나게 잘랐다. 

 ― 이거 이 서방, 내가 읍내 푸줏간에서 오래전 인연을 만났지, 뭐야. 고기 맛도 기가 막힐 거야. 오느라 힘들었지? 우리 사위들이 맛나게 구워보게나. 자, 숙녀분들 나오세요. 공기 좋은데 와서 왜 안에 갇혀 계셔. 

 ― 아빠, 저 왔어요. 

 ― 그래, 선우 일하고 오느라 피곤하겠어.

 ― 아냐, 나오니 좋네. 제부 오늘 고생했죠?

 ― 고생은요? 일하고 오시느라 힘드셨죠? 형님은 운전하느라 힘드셨고요.

 ― 일이야, 뭐. 난 일도 재밌어. 하하하하 이야, 맛있겠다.

 ― 이리들 와서 앉아. 이 서방도 앉고. 

 ― 네     

냉랭하게 얼어붙은 엄마와 아빠. 엄마가 억지로 웃을 때면 눈가의 주름도 멋쩍게 파인다. 냉랭함이 새 나오지 않게 엄마는 눈가에 더 힘을 꽉 주는 것만 같았다. 힐아버지 할머니 엄마 이모 모두 엄마의 마음을 헤아렸을 테다. 그럴수록 모두 공중의 공기를 간신히 붙들어 따습게 물들였다. 그 곁에서 아빠는 끌려 온 손님처럼 최선을 다해 겉돌았다. 잠들 시간에 시작된 저녁인지라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웠다. 결국 아빠는 할아버지 이모부와 자기로 한 방에 들지 않고, 홀로 차에서 간밤을 보냈다. 

하루 새 푹 시든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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