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클리닉 상담일지
어릴 때 우리 집은 불행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혼한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라곤 두 분이 싸우고 울고 소리 지르는 기억뿐이다.
두 분이 이혼하고 나서는 싸우는 모습은 사라졌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고통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이 이혼하고 처음에 나와 언니는 엄마를 따라갔다. 하지만 엄마는 생활비가 넉넉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가 울면서 우리를 불렀다.
'아빠가.. 너네 고아원에 갖다 버리래.. 어떡하면 좋니..'
어린 나는 처음 느껴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졌다.
아빠는 엄마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애들 데리고 아빠에게 돌아오거나
애들을 버리거나.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데리고 아빠한테 돌아갔다.
나는 기뻤다. 엄마와 아빠가 다시 같이 산다니 기뻤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갔는데 엄마가 짐을 싸고 있었다.
'은아야 엄마 아빠랑 도저히 같이 못 살겠어.. 엄마가 너무 미안해..
아빠랑 같이 있어.. 엄마가 종종 놀러 올게
이따가 언니 학교 끝나고 오면 같이 콜팝 사 먹어'
엄마는 정확히 오천 원을 쥐여주고 혼자 떠났다.
근데 나는 슬프지 않았다. 엄마가 갈 걸 알았던 것 같기도 하고
죽은 것도 아닌데 뭐 또 보겠지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손에 쥐어져있는 콜팝과 맞바꿀 수 있는 이 종이가
조금 기뻣던 것 같기도 하다.
언니가 돌아오고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엄마 갔어, 엄마 아빠랑 같이 못 산대.
근데 엄마가 오천 원 줬어 우리 이걸로 콜팝 사 먹으래'
언니는 오열을 했다.
내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게 울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언니가 울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마음이 먹먹해지는 걸 느낀다.
그렇게 엄마가 떠나고 우리집은 따듯함을 잃었다.
아빠는 난방비가 아까워 언니와 내가 지내는 방만 남겨두고 보일러 전원을 꺼버렸다.
어떤 때는 온수가 끊겨 겨울에 큰 주전자에 물을 끓여
찬물과 섞어가며 샤워를 했다.
차디찬 부엌에서 패딩을 잔뜩 껴입고 밥을 차려
언니와 둘이 먹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스팸을 지금 먹자, 나중에 먹자로 울고불고 싸우며
그렇게 둘이 찬 겨울을 보냈고 결국 둘 다 발에 동상이 걸리고 말았다.
동상이 걸린 것도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엄마를 보러 갔다가 우리 발을 보고 우는 엄마를 보는 게 슬펐다.
동상이 걸린 사실은 슬프지 않았지만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남들보다
까맣게 변해버린 열 개의 발가락은 계속 나의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나는 여름에도 샌들을 잘 신지 못했다.
수능이 끝난 날, 야자로 맨날 10시까지 학교에 붙잡혀 있던 내가
이 시간에 밖에 있을 수 있다니 너무 신이 났다.
그길로 바로 알바를 구하러 다녔다.
동네 빵집에서 알바를 구한다고 적혀있었고
운이 좋게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했다.
대학교에 가니 시간도 많아지고, 알바를 계속하니 돈도 여유가 있어졌다.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느꼈다.
아 어린 나는 힘들었구나, 불행했구나,,
그때는 힘들지도 슬프지도 않았는데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살아보니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일반적인 거고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거였어
힘든 거였는데 내가 애써 부정한 거였어
힘들었다고 얘기할 곳도 없었고, 어쩌면 매일 울며 힘들어하는
엄마, 언니에 비하면 내가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착각을 한 걸 수도 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어릴 때 이미 내가 겪었어야 할 힘듦을 다 겪었다고
앞으로 나는 행복할 일만 남은 게 확실하다고
주문을 걸듯이 항상 생각했다.
그리고 33살이 된 지금, 나는 힘들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아냐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
다 이러고 살아,, 다 지나갈 거야..
이 정도인 게 어디야, 좋은 것에 조금 더 집중하자
다짐하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곧 깨달았다.
아냐 지금 나 힘든 거 맞아.
이거 혼자 극복하긴 어려울 것 같아.
"여보 우리 부부 상담받으러 가는 거 어때?"
싸우는 한 시간 내내 인상만 찌푸린 채 말하지 않던 남편은 알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