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이 변했는데 변한 게 없다.
평일 낮에 버스를 타며 한 생각
9월 한 달, 많은 것이 변했다.
휴직을 했다. 늦잠을 자도 된다. 밥을 천천히 먹어도 된다. 신호등 바뀔 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버스 붙잡으려 뛰지 않아도 된다. 꼭 급행열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이 시킨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원치 않는 변수가 확실히 줄었다. 이것저것 해보고 싶던 걸 시도해 볼 수 있다. 내 뇌에서 다른 사람, 다른 일을 빼도 된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상황을 만들어 냈다. 왜 진작 쉬지 않았을까 후회할 정도로 풍요로운 마음이 밀어닥쳤다.
그런데, 바뀐 게 없다.
난 여전히 엄습해 오는 공허감과 불안감에 떨고 있다.
똑같다.
날 사랑한다.
증오한다. 아니, 혐오한다.
아무래도 내가 천재인 것 같다.
내가 제일 한심하다. 멍청이도 이런 똥멍청이가 없다.
후련하고 자유롭다.
죄스럽다. 두렵다.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평생 날 따라다니던, 이 모순적인 감정은 언제쯤 익숙해지려나.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기 바쁘다.
순식간에 발 딛고 있던 자리에서 지구 반대편으로 끌려가는 느낌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분명히
절대적인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많이 주어졌다.
그런데, 또 바쁘다. 시간이 없다. 잠이 안 온다. 익숙한 두통과 근육통이 찾아온다.
한시라도 빨리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야 해서 마음이 급하다.
출근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우왕좌왕 우유부단하다.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하고 싶고 욕심은 늘어만 간다.
쉽게 피곤해지고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몸을 혹사시킨다. 그리고 자책한다.
언제쯤,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면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멈출 수 있을까.
나의 존재 이유와 사람들의 인정을 분리시킬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즐겁게 할 수 있을까.
사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지쳤다. 좀 많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푹 쉬고 싶다.
예상은 했다. 어렵게 휴직을 선택했지만, 휴직한다고 해서 모든 게 바뀌진 않을 거란 걸.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걸. 머리로는 이미 예습했다 해도, 밀어닥치는 감정을 온몸으로 통과하려니 쉽지 않다. 헤매고 도망치기 일쑤다. 모래사장에서 햇빛을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누워 있는 나뿐만 아니라, 깊은지 깊지 않은지 모를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도 조금은 더 편안해지길 바랄 뿐이다.
많은 것이 변했는데 변한 게 없다.
오락가락한 나도 여전하지만, 세상도 그대로다. 일을 쉬고 돈을 벌지 않으면 온 세상이 날 손가락질하고 등을 돌릴 줄 알았는데 다행히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너무 멀리 보지 말고, 딱 오늘 하루만 버틸 힘을 내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