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날 쓰는 모닝페이지
2025.10.31. 금 10:28
가끔은 완전한 무의식에서보다 생각이 차분하게 정리된 후 글을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 꿈에서 깨자마자 잠결에 휘갈겼다면 오늘의 글은 파괴적인 저주의 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그런 글도 다 수용하는 게 모닝페이지겠지. 어렸을 때는 화나는 일이 있다면 노트에 저주의 말을 무작정 쓰는 게 버릇이었다. 종이에다 대고 화풀이를 하는 거다. 지금도 그 버릇은 여전하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좀 정리되면 '이런 말을 하다니 미친년..'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못된 말을 적어놓는다. 그래서 지금은 그 문장에 빨간 색연필로 죽죽 선을 그어 숨긴다. (물론 굳이 확인하고자 하면 내용을 알 수 있다) 내 다이어리는 기밀문서다. 그렇지만 막 아무 데나 놓는다. 어렸을 때야 책꽂이에, 서랍에 꼭꼭 숨겨두었겠지만, 이제는 아무도 내 일기를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는 무언의 신뢰가 있다. 옛날엔 그런 험한 말을 종이에 써놓고도 기밀문서로 만드는 방법을 잘 몰라 저주를 하고 종종 들키곤 했다. 그걸 읽은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후회한다. 내가 왜 그런 말을 썼을까, 왜 그런 생각을 썼을까. 왜 누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을까. 내 인생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했을까. 너무 싫다고 썼을까 왜. 난 그들 없이는 살 수가 없는데, 그들이 죽어버린다면 가장 슬퍼하고 후회할 사람이 난데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종이와 잉크를 포로로 마구 화풀이를 해댄다. 종이에 펜을 문대고 가끔은 찢어버린다. 내가 종이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 같다. 글에게 빚지는 것 같다. 갚으려면 종이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야 할까? 멋진 글을 써야 할까? 지은 죄가 많아서 곤란하다.
오늘은 동네에서 괜찮은 정신과를 알아보려 한다. 내 자존감, 주의력 결핍, 남을 깔보고 내가 우월해져야지만 채워지는 마음, 질투심 이런 것들 다 스스로의 어떤 결핍에서 오는 것 같다. 그리고 요즘 들어 자주 터지는 분노. 가끔은 내 안에서 분노가 마그마처럼 끓다가 터져버려서 제어가 안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화나 복잡함이 희고 넓은 방 안에 고립된 나를 눌러 찌그러져버리는 상상에 못 이길 때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3D로 상상을 많이 했다. 정육면체로 된 흰 배경과 검은 선 밖에 없는 방 안에 홀로 갇혀있는 나. 방은 점점 넓어지는데 나는 점점 작아지고 각종 글자와 선, 복잡한 무언가가 방 안에 가득 차면서 나를 짓누른다. 이건 뭘까? 얼마 전엔 이 상상을 하다가 환청까지 들었다. 딱 한 번이지만.
난 오늘도 글에게 빚을 지고 있다. 내가 쓸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은데. (꼭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쓰고 싶다. 좋은 이야기를) 더 이상 채무를 쌓을 수는 없어서 털어내려 한다. 일단 모닝페이지를 다시 쓰는 것만으로도 실타래 하나를 푼 것 같은데, 어딘가 찝찝하다.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에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분노해야 할 대상이 세상에 너무 많다. 나에게, 내 가족에게 향하는 화살을 돌리자. 응? 부술 수는 없나? 물론 세상에 화나는 일이 너무 많긴 하지만.
표출. 예술. 아름다운 것. 그것이 어떤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지는 표현하는 사람에 따라 무궁무진한 것. 딱 알맞은 0.5mm 펜심을 끼우고 내가 좋아하는 그립감을 회복하고 나서야 나는 다이어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어저께 써놓은 것들.
1. 지속 가능성 - 환경, 의류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읽어보고 내 생각을 정리하기. 내 삶과 연관 짓기)
2. 떡볶이 원정대 (나태가 써준 기획서가 있음. 그것을 참고하여 떡볶이 원정대 여행을 떠난 후 쓰기)
3. 할머니들 혹은 가족들 (내가 너무너무 잊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 이 역시 나태 기획서가 있음)
4. 무명배우 살아남기 - 각종 도전, 연습, 솔직한 내 마음과 과정 기록
5. 여행기 - 여행하면서 얻은 사람과 마음
6. 포토에세이 - 내가 찍은 사진과 그에 담긴 이야기
쓸 말이 많구먼. 11월 하순에는 홀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노트북과 다이어리 하나씩 들고서. 그때까지 성실하게 운동을 해야지. 가족들과 아까운 시간을 잘 보내야지. 엄마랑 단풍구경을 가야지. 부동산 임장을 가야지. 열심히 써야지. 열심히 움직여야지. 열심히 봐야지. 언어 공부를 해야지. 연습을 해야지. 가끔 부모님은 말한다. 대충 살아도 된다고. 그렇다면 내가 행복한 정도로 해야지.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날. 찬 공기가 불쑥 들어와 방 안을 채우는 계절. 춥다가도 햇살을 맞으면 따스하고 포근해지는 계절. 잊혀지는 계절이라기엔 아깝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