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보면 오늘이 호시절이려나

언제나 꾸준해지고 싶은 게으른 사람의 계획

by 엄달님

2025.11.1. 토 9:29


아 오늘은 글을 쓰기 싫다. 어제만 해도 이걸 저걸 써야지 의욕이 넘쳤는데 오늘은 의욕이 없다. 아무래도 오늘은 밖으로 나가야겠다. 깨끗하게 씻고 나가야지. 날씨가 추워질수록 점점 씻기가 싫어진다. 나중에는 엄청 물 좋은 목욕탕 근처에서 살고 싶다. 따뜻한 탕에 몸을 푹 담그고 싶다. 그런데 왜 샤워는 하기가 싫을까. 씻지 못하는 걸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라고 말해주신 분이 있는데, 그때는 내가 방 정리도 전혀 하지 못 하는 상태였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요즘 내 방은 내 기준으로 무척 깨끗하다. 어제는 영수증이 널브러져 있는 책상을 정리했다. 빨래를 밀리지 않고 정리해 넣는다.


그래도 오늘은 샤워로 아침을 시작해야겠다. 운동도 안 한지 너무 오래됐다. 달리기를 하면 우울감 해소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한다. 실제로 달릴 때 그런 기분을 느끼지만 얼마 전 10K 마라톤을 하고 난 다음에 무릎이 상해서 제대로 걷기도 어려운 상태다. 근력이 너무 없는 상태로 많이 뛴 것 같다. 신청만 해놓으면 내가 해낼 줄 알았는데, 아 물론 완주를 해내긴 했지만 몸이 고장 났으니 절반짜리 성공 같다. 오늘부터는 근력운동과 요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매일 씻기, 매일 운동하기. 누군가에게는 무척 쉬운 일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평생의 숙제다. 잘 안 된다. J는 토요일 아침마다 축구교실에 간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조기축구도 가고 일요일 밤에도 종종 축구에 간다. 배드민턴을 다닐 때도 날 만나기 전에는 퇴근하고 거의 매일 출석했다는데, 나랑은 정반대 성향의 모습에 무척 신기했다. 나는 얼마를 주고 운동을 끊어놔도 늘 돈을 날리기 일쑤였다.


딱 한 번 안 가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 출석하지 않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너무 귀찮아지고 하기 싫어진다. 그럼에도 눈 딱 감고 가야 하는 것이 맞는데, 나는 보통 안 가는 쪽을 선택한다. 이런 식으로 포기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아빠를 닮았다고 하는데, 이제는 내력(?)으로 핑계 댈 때는 아닌 듯. 아무튼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은 꾸준한 사람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매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거지? 루틴을 만들어서 지킬 수 있는 거지? 특히 하다가 포기한 것 중 하나는 새벽 수영인데, 수영장에 가면 생각보다도 회사원들이 많아서 신기했다. 도대체.. 회사 가기 전 새벽에.. 어떻게 운동을 할 수 있는 거지? 나와 하루의 밀도가 아예 다르구나.


그런데 아침형 인간 되기 프로젝트, 미라클 모닝, 이런 거 다 해봤는데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너무 피곤하다. 적정 시간이 여덟 시 반쯤이다. 요즘에 엄마아빠는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운동을 하시는데, 합류하고 싶다가도 너무 일찍 일어나야 해서 포기한다. 엄마는 몇 시간 자지도 못 하고 새벽운동을 하다니. 잠을 잘 자야 하는데. 그래. 사람마다 각자 루틴이 있는 거지. 나만의 루틴을 만들면 좋긴 하겠다.



<나만의 하루 루틴 만들기>


8:00 일어난다. 모닝페이지를 쓴다.

8:30 피임약을 먹는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양치를 한다.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마신다.

8:40 간단한 아침운동을 하고 아침밥을 먹는다.

*목표: 간식 중독에서 벗어나기*

*하루종일 음악을 가까이 하기*


9:30 할 일을 시작한다.

- 수업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연습이 있을 수도 있다.

-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몸 풀기 루틴, 발성 연습, 글쓰기, 영상 찍고 기록, 대사 연습 등을 한다.

-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도 몸 풀기는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한다.


13:00 점심을 먹는다.

*끼니를 거르고 싶어도 반드시 뭐라도 먹고, 꼭 건강하게 먹는다.


14:00 다시 할 일을 시작한다.

- 오전에 하던 일의 연속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최대한 많이 보내자.

- 할 일은 최대한 17:00 전까지 끝내 보기.


17:00 저녁 시간 시작

- J와 데이트를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같이 운동을 할 수도 있다)

- 운동을 가는 시간이 종종 있을 수 있다.

-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하기 시작한다.

- 저녁밥은 반드시 챙겨 먹되 음주는 자제한다.


21:00 밤 시간 시작

- 밤 수업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 연습이 시작되면 밤까지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다.

- 블로그 글을 쓴다. 부업을 점검한다.

- TV도 보고 유튜브도 본다.

- 일기를 쓴다.


23:00 밤 요가를 간단히 하고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신다.

23:30 자기 전 독서를 한다.

24:00 취침한다.




아! 오래 걸렸다! 루틴을 만들고 나니 이미 모닝페이지를 쓰다가 열 시가 넘어버렸는데도 하루를 부지런히 산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괜찮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그나저나 브런치스토리 글씨 색깔은 다 별로다. 색깔 업데이트를 좀 하면 좋겠다. 나는 게으르지만, 언제나 부지런함을 꿈꾸는 꿈 많은 게으름뱅이. 이 고질병을 고치고 싶은데 어려워서. 조금씩 고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영역을 나눠보자. 내가 세운 하루 루틴 정도야 무조건 당연히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것들이겠지.


일단 샤워를 하자. 엄마는 집에서 할머니 똥꼬 닦아주는 것 같은 거는 이제 그만하고 나가서 시간을 보내라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 시간이 호시절 아닐까나. 가족들과 다 같이 지낼 수 있는 시절이 나에게 얼마나 남았을까. 언젠가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엄마 아빠도 언젠가는 돌아가시고. 나는 결혼을 할 테고. 결국에 혼자 살게 될 것이고. 할 일을 집에서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이유다. (가끔은 집에서 미친 듯이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긴 하다)


지나고 보면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일단 씻자.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2화잊혀진 계절이라기엔 아깝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