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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수 Oct 20. 2021

[라일락 대신 헤베꽃] Lingering

라일락 대신 헤베꽃 - 4


Lingering

lingering [형] (쉬 끝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오래 끄는[가는]  (출처: 네이버 영어사전)




대학교 생활을 한 학기 남짓 남겨두고 있을 때였다. 기말곡을 시작하기 위해 여느 때처럼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떤 주제로 있어보이는 척을 할까, 마땅한 주제가 유난히도 생각이 나지 않아 지난 해에 망쳤던 곡의 주제를 조금 다르게 리메이크 해보기로 했다.


지난번에 망쳤던 그 곡의 제목은 <망각>이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감명깊게 본 뒤 쓰기 시작한 곡이었다. 헤어진 연인과의 아픈 기억을 지우려다가 행복했던 추억까지 제거되어 주인공이 괴로워하는 과정을 잘 표현한, 기억과 망각에 관한 영화였다. 아이디어는 영화를 통해 얻었지만 단지 생각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그리기 시작한 마인드맵은 점차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줄곧 무언가를 기억하고 망각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가 경험한 사건은 좋았건 나빴건 시간이 지나면 어느정도 희미해진다. 

'망각'. 좋은 주제가 생겼다고 생각해 시작했지만 보기좋게 망쳐버리고 말았다. 잊어버리는 소재만 가지고 쓰려니 전개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망각을 직관적으로 계속 사라지는 것으로 표현하다 보니 곡이 재미없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진 않아 딱히 마음에 들지 않게 마무리했었다.


꽤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그럴듯하게 풀어내지 못했던 지난 날이 후회되어 다시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는 망각하는 것과, 사라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의 형태를 둘 다 나타내기로 했다. 내가 본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 곧 추억과 그것의 망각을 표현한 영화였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소중한 추억을 만들며 살아간다. 또 힘들었던 기억은 서서히 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다. 


모든 일에는 잔향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떠한 경험을 한 것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그것은 긍정적인 사건일 것이다. 또한 부정적인 사건이 있다. 그것은 아주 심각한 것이 아닌 이상 오랜 시간이 지나면 대강은 잊혀진다. 다시 기억되더라도 어느 정도는 미화되게 마련이다. 사건의 체취는 오래 남아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기억은 유지되거나 또 잊혀져간다. 우리는 힘들고 괴로운 일을 마구 잊어버리려 애쓰기보다, 행복한 추억을 잘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사진과 동영상을 남기거나, 글로 표현해 두기도 한다. 힘들었던 기억을 잊기 위해서는 보통 더욱 행복한 기억으로 덮으려 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억지로 괴로운 기억을 지우려는 영화의 주인공을 통해 말이다.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유지되는'것과 '사라지는'것을 표현할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집에서나 학교 도서관에서 악보를 찾아보기도 하고, 영화를 한번 더 감상하며 대사를 곱씹기도 했다. 연인과의 사랑이 깨져가는 과정에서의 괴로운 기억들을 지울수록 행복했던 기억들도 상기하는 과정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 

주인공 조엘의 머릿속에서 연인 클레멘타인과의 행복한 추억마저 삭제될 때 그가 울부짖으며 한 대사다. 


"이 추억마저 곧 사라지게 돼. 어떻게 하지?"

"그냥 음미하자."

행복했던 순간에 남녀의 대사를 통해 기억의 소중함을 나 또한 함께 음미했다.


'Lingering'. 최상으로 마음에 드는 단어는 사실 아니었지만 내가 나타내고 싶은 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였다.


표현을 위해 잔향이 많이 남는 어쿠스틱 악기를 사용하고 싶었다. 현악기가 떠올랐지만, 현악기보단 왜인지 모르게 타악기가 좀 더 끌렸다. 단지 그 이유로 타악기만으로 이루어진 곡을 만들고 싶어 마림바와 크로탈리스를 선택했다. 타악기 중에서도 건반악기인 마림바의 소리가 울리는 직후 크로탈리스의 맑은 음색으로 메아리처럼 잔향이 울려퍼진다. 아쉽게도 연주를 하지는 못했던 곡이지만, 그리고 타악기 테크닉이 부족해 퀄리티도 아쉬운 곡이지만, 20대에 생각했던 소재 중에 흥미로운 편에 속했던, 작업하는 내내 재미있었던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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