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자두』 (이주혜, 창비)
우리는 모두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다 드러내지 않고, 솔직한 감정을 모두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너무 솔직한 표현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서 상대에게 실망감을 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 그런데 그 가면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벗겨지는 순간도 있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해서 어떤 말이나 표정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리거나, 술에 취해 이성을 잠식당했거나, 이 소설 속 노인처럼 질병에 의한 일시적 섬망으로 스스로의 의식을 컨트롤하지 못할 때. 때론 그런 상황이 상대의 감춰진 진심을 짐작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평소 나에게 보여주던 모습과 순간적으로 나타난 진심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클 때는 진실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진다.
『자두』에서 안병일은 이상적인 시아버지로 묘사된다. 일찌감치 홀로되긴 했지만 다정하고 세심하며 눈치도 빨라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혼자서 살림도 잘 꾸려나가고 뭔가를 성실히 배우고 사람들과도 적당히 어울리며 외적으로도 깔끔하고 단정하게 자신을 가꾸는 노인이다. 처음 인사를 온 아들의 연인에게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라고 칭하며, 결혼 후에는 그녀에게 “이제 너를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대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실제로도 그는 며느리에게 머리핀이나 스카프를 사주는 등, 그녀 스스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끔 행동한다. 그러나 며느리 은아가 느꼈던 그 감정이 산산이 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서로의 사회적 가면 덕분에 평온했을 뿐, 감춰져 있던 진심을 아는 순간 관계의 균열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설 속 표현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아직 원망도 미움도 당도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끼리 순진하고 평온했습니다. 적어도 그 풍경에 금이 가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33p)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 ‘우리 집에서 제일 쓸모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도둑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깨닫는 슬픔. 아니다, 어쩌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안병일의 마음에는 ‘도둑년’이라는 생각이 먼저 자리를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반가움과 괘씸함이 공존하고 있었거나.
어떤 인간관계에서나 이처럼 알고 싶지 않은 진심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며느리’라는 입장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좀 더 서럽고 억울하다. 은아가 느낀 것처럼 ‘죄도 없이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거나,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용서를 받는 더러운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억압적인 구조가 있는 것이다. 한 여성이 가부장적 문화 배경 속에서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스스로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죄라면 죄일까. 수많은 여성들이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도 어느 순간엔 결국 ‘원밖으로 떠밀려난 가엾은 타인’이 되고 마는 일을 경험한다. 소설 속에서 은아와 간병인 황영옥이 어떤 말도 없이 서로의 외로움과 슬픔을 나눈 것처럼, 우리에게는 각자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사회적 가면을 덮어쓴 껍데기 같은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위안이 되는 진실한 관계 말이다.
책 속에서
고모는 원 밖으로 떠밀려난 가엾은 타인에게 최대치의 동정심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원심력과 함께 영원히 우주 밖으로 날아가버린 존재를 향한 반사적인 연민. 죄도 없이 용서받는 기분이 더럽다고 말했던 지난날의 제가 얼마나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날 죄도 없이 가혹한 형벌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p.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