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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면하는 문학

독서일기 「아기 부처」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수록작, 문지)

by 서정아

사랑과 미움, 동경과 질투, 친밀감과 낯섦….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은 감정들이지만, 그 감정의 시작점을 되짚어보면 결국 같은 곳에서 촉발되는 것 같다. 상대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이고 감정의 시작점은 변함이 없는데, 그 마음의 끝은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인간관계의 비극적 숙명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이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관계가 지속될수록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는 불가피성은 대체로 관계 변화의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10미터의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1미터 거리에서는 자세히 보인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것들이 세밀하게 보인다. 누군가가 좋아지면 가까이 가고 싶기 마련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욕망이 때로는 멀어짐의 이유가 된다.


어떤 시인은 자신의 시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썼고 그 문장은 대중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절대적인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를 발견한다면 자세히 볼수록 그 가치를 더욱 체감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존재는 조금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 더 아름답다. 대충 보았을 때는 예뻤는데 자세히 보면 징그러운 무늬를 외면하고 싶기도 하고, 멀리서 보았을 때 시각적으로는 아름다웠는데 가까이 갔을 때 느껴지는 후각이나 촉각의 감각을 견딜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거리나 각도에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과연 얼마나 될까. 특히 불완전한 인간의 경우에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순간 필연적으로 멀어짐이 뒤따라온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 거기에서 고통이, 괴로움이 촉발된다. 「아기 부처」의 주인공들처럼.


이런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가볍게 무시하고(혹은 외면하고) 모든 것을 선함과 아름다움으로만 귀결시키는 문학작품을 나는 좀 신뢰할 수가 없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문장이긴 하지만, 내가 문학에서 찾고자하는 바는 빠져 있다. 최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던 ‘잡화점, 서점, 편의점, 세탁소’ 등의 장소성을 내세운 소설들이 보여주는 막연한 희망과 인간애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건가 싶어 몇몇 작품들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밍밍한 국물만 들이킨 것 같았다. 조금 속은 기분도 들었다. 결코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고 막연하게 다 잘 될 거라고, 희망을 가지라고, 세상은 아름답다고만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 같았다. 내가 지쳐 있는 순간에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해준다면 그건 물론 고마운 일이겠지만, 문학을 통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내가 문학을 통해 듣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슬프고 고통스럽고도 끝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그 과정 전부를 말하는 일이 힘들다고 해서 결코 외면하거나 축소해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주인공이 꾸었던 꿈속에 등장하는, 아기의 모습도 아니고 부처의 모습도 아닌 ‘아기 부처’가 실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고 그 사실을 직면하고 겪게 되는 고통마저 오롯이 감내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위치에서 보든 오래도록 아름다울 새잎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 「아기 부처」에 나오는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라는 문장은, 막연하고 허황된 희망이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을 직면하고 견뎌낸 자의 단단하고 고귀한 기쁨이리라.



책 속에서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누군가가 속삭여준 듯 문득 떠오른 말을 속으로 되뇌며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새벽빛은 천천히 가셔갔다. 꽁지가 푸른 산까치 한 마리가 마른 울음을 뱉으며 철조망 너머로 날아갔다. 바람이 일 때마다 벌거벗은 나뭇가지들이 몸 스치는 소리를 냈다.


- 한강 「아기 부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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