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해서 용감한 우리
밴쿠버에는 겨울에도 거의 눈이 오지 않는다. 영하로 내려가는 일도 거의 없다. 아니, 없었다.
그런데 올해에는 완전 이상 기온으로 이 밴쿠버에 영하 10도가 넘는 날도 많았고, 매일 내리던 비는 당연히 눈으로 바뀌어서 몇 주째 내리고 있다. 조금 녹을만하면 다시 추워져서 길이 얼고,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리고를 반복하고 있다. 눈에 대한 대비가 별로 없던 밴쿠버 시민들이 난리가 났다. 눈 치우는 삽이 동나고, 스노우 타이어 없는 차들이 여기저기 미끄러져 있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우리 부부는 10센티가 넘게 쌓인 눈도 무서워하지 않고 겨울 캠핑을 떠났다.
트럭 타이어를 최근에 좀 크고 좋은 것으로 바꿨으니까 괜찮을 거야...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가는 길이 좀 미끄럽긴 했으나, 평소보다 속력을 좀 덜 내면서 살살 가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옆으로 가는 몇몇 차들이 우리한테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러지? 세워볼까? 당장 세울 수 있는 곳도 없고 해서 일단 그냥 달리고 있는데 또 다른 차가 빵빵거리며 아주 다급한 표정으로 뭐라 뭐라고 한다. 다행히 고속도로 출구 표지판이 보여서 일단 나갔다. 제일 가까운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한 바퀴 둘러보는데.. 오 마이 갓 ~~ 트럭 뒤에 달고 오던 캠핑 트레일러 타이어 중 하나가 완전히 그야말로 완전히 다 터져버렸다. 살면서 그런 건 처음 봤다. 고무 부분은 하나도 남지 않고 타이어 휠만 달려있었다. 그나마 지금 발견한 게 다행이지 휠 부분까지 망가졌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달려오면서 이상한 소리들이 나긴 했는데 우리 차에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르고 운전하는 데는 전혀 이상이 없었기에 눈치를 못 챘던 것이다.
얼른 스페어타이어로 바꿔 끼고 다시 출발. 가면서 대책을 논의했다. 일단 캠핑장에 체크인하고 트레일러를 내려놓자. 트럭과 분리하고 근처 제일 큰 도시인 스쿼미시로 가서 새 타이어를 사서 오자. 문제는 오후 3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었는데 보통 카센터들이 4시 정도면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은 주말이라 문을 여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상황이 좋지는 않다.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새 타이어를 확보해 놓아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다.
계획대로 캠핑장에 트레일러를 재빨리 내려놓고, 스쿼미시로 가서 구글맵이 알려주는 몇 군데 타이어 샾을 돌았는데 벌써 문을 닫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해서 없어진 가게였다. 마지막 하나 남은 곳을 갔는데 문 닫기 3분 전이란다. 다행히 맞는 사이즈도 있어서 바로 구매를 했다. 처참하게 찢긴 타이어를 보더니 어떻게 살아서 왔냐고 신기해한다. 생각보다 가격도 착하게 해결이 됐다. 큰 위기 상황을 넘긴 우리는 스스로 칭찬하며 뿌듯하게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2박 3일 일정 중 둘째 날, 예상치 못한 폭설이 내렸다. 아침에 눈을 뜨고 문을 연 순간, 세상에나. 겨울 왕국 한복판이었다. 잠을 깨고 트레일러 밖으로 나간 순간 어마어마한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낭만적이야 ~ 하면서 황홀해하는 내 뒤에서 남편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우리 이제 큰일 났다. 내일 어떻게 나가냐 하면서. 그래도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며 하루를 온전히 즐겼다.
다음날 아침 아직 눈이 내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밤새 캠프 사이트 전체가 정전이 되는 바람에 전기장판도 켜지 못하고 좀 춥게 잤다. 다행히 가스로 히터를 돌릴 수 있어서 버텨 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엄두가 안 나긴 하지만 월요일부터 남편이 일을 해야 하니 집에 안 갈 수도 없었다. 막연히 괜찮겠지 하면서 출발 준비를 하고 살살 나오는데 아무래도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언덕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트럭 혼자 올라간다면 그 정도는 가뿐히 가겠지만 3천 킬로그램이나 되는 트레일러를 뒤에 달고 올라가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고속도로만 타면 밴쿠버 쪽은 비가 온다고 하니 괜찮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가 문제다.
일단 초입의 방문자 주차장에 세워놓고 눈이 좀 멈추기를 기다렸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다가 다시 트럭과 분리를 해서 스노우 체인을 사러 가기로 했다. 얼마 전 트럭의 타이어를 좀 큰 사이즈로 교체하면서 스노우 체인까지 바꿀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이다. 30분 정도 달려 스쿼미시에 도착했다. 이틀 전에는 새 타이어를 찾아다녔는데 이번에는 체인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크기가 아니고 너무 큰 타이어라서 맞는 체인을 구할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트레일러 세워둔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남은 방법, 원초적인 방법으로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마침 눈발이 약해졌기에 관리사무소에서 큰 삽을 빌려 언덕길의 눈을 치웠다. 우리처럼 못 나가고 있던 몇 명이 우리를 보더니 와서 힘을 합한다. 남편은 옷이 땀으로 완전히 젖었고 눈이 다시 쌓이기 전에, 다른 차가 지나가서 다시 얼음을 만들기 전에 얼른 빠져나왔다. 우리 뒤에도 줄줄이 따라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언덕을 올라 성공적으로 고속도로를 타긴 탔는데 뭔가가 이상하다. 뒤에서 처음 듣는 소리가 난다. 지나가는 차도 손짓을 하며 문제가 생겼음을 알려준다. 뭐지? 또 뭐가 문제지? 그래도 세울 수가 없어서 한참 가다 세우고 보니...
하하하... 이제는 웃음이 난다. 이번엔 트레일러 제일 앞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tongue jack 이 반으로 구부려졌다. 주차시킬 때 밑으로 내려놨던 잭을 눈 오기 전에 얼른 출발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위로 충분히 올리지 않고 출발했던 것이다. 한번 멈추면 다시 눈길을 올라갈 수 없으니 속도를 내서 쭉 올라갔는데 그때 어딘가에 걸려서 반으로 꺾인 것 같다. 이렇게 계속 바닥에 끌리게 갈 수는 없고 별의별 방법을 써보다가 타프 칠 때 쓰던 로프를 꺼내서 위로 최대한 당겨 칭칭 감았다. 땅에 끌리지는 않으니 집까지는 이 상태로 가는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무사히 잘 도착했고, 온라인을 통해 새로 tongue jack 도 구입했다. 구하기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꽤 다양하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셀프로 교체하는 동영상도 아주 많이 올라와 있었다. 덕분에 큰돈 안 들이고 남편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주는 tongue jack 이 없으니 네 발로 트레일러를 지탱하는 잭을 전부 내려서 고정시켜놨었는데, 이 엄청난 무게를 감당 못하고 하나가 완전히 구부려져서 이것도 또 교체를 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그동안 교체하고 손본 것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점점 박사가 되어간다. 이렇게 몇 년 쓰다 보면 새로 하나 만들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트레일러를 구입한 지 일 년이 되지 않았으니 아직 4계절을 다 겪진 못했다. 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면 드디어 일 년, 그쯤 되면 대부분 파악할 수 있겠다 싶다.
별의 별일을 다 겪고 이제 캠핑에 정이 뚝 떨어질 만 한데, 2주일 지나니 또 몸이 근질근질하다. 사실 나는 옆에서 구경만 하고 고생은 남편이 다 했으니 내가 먼저 가자고는 말을 못 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먼저 이번 주말에 가자고 한다. 자기도 몹시 떠나고 싶다며..
이번에는 또 무슨 사건이 생길지 모르지만 그것 또한 즐기리라.
고구마 잔뜩 싸가지고 가서 구워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