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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진 Apr 02. 2024

육아와 글쓰기의 균형





© miracleday, 출처 Unsplash


육아와 내가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 맞추기. 잘되지 않는다. 여전히 어렵다. 육아에 소홀했다 싶으면 아이에게 미안해진다. ‘넌 엄마잖아, 지금 아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하며 나를 몰아세웠다. 


아이를 키우면서 독서, 글쓰기, 자기 계발과 같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 책을 읽다가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의자처럼 흔들린다는 비유를 봤다. “인생은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것이 아니고, 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영욱 작가의 책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에 나오는 말이다. 이 구절을 읽는데 곧바로 내 상황이 떠올랐다. 맞다. 나는 완벽하게 설계된 의자가 아니라 여러 환경과 감정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다. 흔들리는 게 당연하고, 완벽하게 균형 맞추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첫 책을 준비할 때,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단순히 내 감정과 생각만 적는 일기와는 다른, 책이 될 원고였다. 하루 한 편의 글을 쓰는데 온종일 걸렸다. 네 살, 세 살 아들과 지내며 틈만 나면 식탁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렸다.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엄마를 수시로 찾는 게 당연할 나이인데도 엄마, 엄마 부르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냈다. 오늘 한 편을 써야 내일도 쓸 힘이 생겼다. 징크스다.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한 번 두 번 세 번 빠지다가 안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나를 잘 알기에 매일 한 편씩 써서 끝까지 초고를 완성해 보고 싶었다.      




© picsea, 출처 Unsplash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자는 아이들 얼굴 한 번 더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못다 쓴 글을 마저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다. 한 편을 다 쓰고 나면 뿌듯함이 밀려왔다. 


다음 날도 어제와 비슷한 상황이다. 글 쓸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사과를 깎아주었다. 이거 먹으면서 놀고 있어 했더니, 책 한 권 뽑아서 찾아온다. 책 읽어 달라고 하는 아이를 밀쳐 낼 수도 없고 속에선 조바심만 인다.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에는 딴생각으로 가득하다. 글만 읽어주는데도 아이는 재밌는지 책을 뚫어져라 본다. 갑자기 울컥 화가 치솟는다. ‘나도 내 시간이 필요하다고!’ 읽기 싫은 걸 억지로 읽고 있는 걸 눈치챈 걸까. 뒤돌아 나를 쳐다본다. 미간에 잔뜩 주름 잡힌 엄마를 보더니 혼자 보겠다며 책을 들고 가 버린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뭔가 쿵 내려앉는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뭣이 중한디… 이러려고 글 쓰는 게 아니란 말이야….’          




© christinhumephoto, 출처 Unsplash


나는 왜 글을 쓰려고 하는가,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답의 끝에는 항상 아이들이 있었다. 나와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는 건데 내가 하는 행동은 그 반대였다. 참 못났다고, 그럴 거면 글은 왜 쓰냐고, 아무것도 안 하고 지금은 육아에 집중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하지만 글쓰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쓰는 과정이 힘들기도 했지만 재밌었다. 한 줄 한 줄 써 나가다가 마지막 문장 마침표를 찍을 때, 뿌듯함으로 온몸이 짜릿했다. 육아에 비중을 두고 다시 균형을 맞춰 나가 보자. 이런 다짐만 수백 번 했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쉽게 짜증을 내거나, 잘못된 행동을 해서 혼낼 때 전부 내 탓 같았다. 조금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육아보단 글쓰기에 치중한 것 같아서, 내 잘못된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아서…. 지금은 자책보다는 어느 한쪽으로 쏠린다 싶으면 다시 다른 한쪽에 신경 쓰면서 나아간다.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것과 글 쓰는 일을 병행해 간다. 

은서를 보면 선우, 윤우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부끄러웠던 내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글을 쓰다가도 은서가 책을 가져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읽어준다. ‘그때 그러지 말걸.’ 두 아들에 대한 미안함에 은서를 더욱 꼭 껴안는다.     




© kaimantha, 출처 Unsplash


공저를 쓸 때 일이다. 읽기 독립을 해나갈 때라 선우, 윤우에게 책 50권을 읽으면 디폼 블록을 사주기로 약속했었다. 일요일 아침, 아이들이 일어나자마자 책을 읽는다. 이제 한 권 남았다며 웃으며 오는 선우와 다르게 윤우는 뾰로통하다. 형은 혼자 쭉쭉 읽어 나가는데 자기는 느리니 애가 탄다. 애가 타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오늘 안에 해야 할 일과 육아, 끼니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다. 차근차근 하나씩 해나가자고, 조급해하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도 생각대로 안 된다. 


아이들은 왜 내게만 붙어 있는가! 엄마에게 해달라는 건 왜 이렇게 많은가! 은서는 뭐 때문에 자꾸 소리를 지르는 건가! 아침 챙기고 설거지하고 내가 꼭 다해야 하는가! 남편은 쉬는 날이면서 왜 방에만 누워 있는가! 종종거리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눈물이 터져버렸다. 손으로 얼굴을 감싼 엄마를 보고 선우가 다가온다. 


“선우야, 엄마… 글이 안 써져….”

“엄마, 내가 은서 봐줄게.”


안방에 있던 남편과 윤우는 모른다. 아이 앞에서 괜히 눈물 보인 게 미안하면서도 마음 써주는 선우에게 고마웠다. 마감이 정해져 있는 글이기에 부담감이 컸다.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썼다. 꼬여 있는 실타래를 풀듯 조금씩 풀어나갔다. 글은 써지는 게 아니라 쓰는 거라고 했다. 알면서도 아이 앞에서 글 안 써진다고 울어버리다니.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되 본업인 육아를 등한시하지 말자고 스스로 격려했다.          



© apsprudente, 출처 Unsplash


최근 《원씽》을 읽으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잡는다는 게 불가능하단 걸 알았다. 기적은 극단에서 일어나는데 삶에서 균형이 무너질까 봐 겁을 내고 물러난다는 거다. 중심을 잡느냐 잃느냐가 아니라 짧게 가느냐, 길게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육아와 글쓰기의 불균형은 당연했다. 개인적 삶에 해당하는 육아, 가족과의 시간, 부모님, 친구, 건강, 신념 등은 놓치지 않아야 할 부분이다. 수시로 확인하면서 나아가야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나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존재다. 반면 직업적인 삶은 길게 봐야 한다. 오랫동안 불균형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에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가족과 육아는 절대 놓아서는 안 된다. 직업적인 삶에 해당하는 글쓰기를 길게 보면 되는 일이다.    




© andrewtneel, 출처 Unsplash


선우, 윤우가 네 살과 세 살, 다섯 살과 네 살 때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의 초고를 썼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한창 엄마 손 많이 가는 아이 둘을 데리고 있으면서 글을 썼다. 연년생 아들 육아의 최전선에서도 썼는데 학교에 가는 지금은 훨씬 낫다. 셋째가 낮잠 자는 잠깐의 시간이 귀하다. 내게도 자유로운 통시간이 생길 날이 온다.     


완벽한 균형이란 없다. 삶이란 내 경험을 바탕으로 수정하고 쌓아나가는 과정이다. 오늘도 엄마와 작가라는 이름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고 있다. 이 둘 사이에서 휘청거리더라도 다시 무게를 맞추며 앞으로 나아간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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