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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진 Apr 09. 2024

전지적 작가 시점



© benyamin_bohlouli, 출처 Unsplash



수능을 치고 교정을 시작했다. 끝나는 데까지 2년 반이 걸렸다. 교정이 끝난 뒤 잘 때 끼는 유지 장치가 있다. 3년까지는 귀찮아도 꼬박꼬박 꼈다. 그 이후로는 소홀해지다가 안 하게 됐다. 치아는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다. 밑에 치아는 안쪽으로 고정 장치가 되어 있는데 위에는 없다. 거울을 볼 때마다 앞니가 앞으로 조금씩 나오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내 치아를 본떠 만든 유지 장치가 맞지 않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치아 움직임이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중학생 때 교정한 동생은 유지 장치를 아직 밤에 끼면서 잘 관리해 오고 있다. 나도 더 늦기 전에 다시 맞춰야겠다 싶어서 재교정을 하게 됐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치과를 방문했다. 친정이 있는 곳에 있기에 남편 차를 타고 왔다 갔다 했다. 주로 선우, 윤우가 학교, 유치원에 간 오전에 다녀온다. 


그날은 치과에 갈 날이 아니었는데 3일 일찍 간 날이었다. 갑자기 가게 되어서 급하게 챙겼다. 학교 앞에서 놀고 있는 선우, 윤우를 태우고 치과로 갔다. 조수석에 앉은 윤우가 남편에게 노래를 틀어 달라고 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던 남편이 깜짝 놀란다. 

“아! 핸드폰! 핸드폰 두고 왔다!” 

그럼 다시 돌아가자고 하는 윤우. 돌아가기엔 절반이나 온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계속 가기로 했다. 

치과 진료받는 동안 남편은 안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은서가 엄마 찾아 소리를 깩깩 지르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도 아이들이랑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겠다 했다. 진료 끝나고 연락은 어떻게 할지가 걱정이었다. 

“텔레파시를 보내.” 

잠시 내가 들은 말을 의심했다. “뭐라구요?” 묻는 말에 똑같이 답한다. 내 전화기를 주고, 진료 끝나면 치과 전화기로 전화하겠다고 했다. 거절한다. 계속 텔레파시를 보내라는 말만 한다. 이 근처에 있을 거고, 한 번씩 왔다 갔다 할 거라고 하면서.




© mahdibafande, 출처 Unsplash



어느새 치과 앞에 도착했다. 차 세워 둘 곳 없는 도로 앞이라 얼떨결에 내려버렸다. 진료는 금방 끝났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고, 이 상태를 보더니 치아 고정을 좀 더 유지하고 2주 뒤에 다시 보자고 했다. 들어갔다가 바로 나온 셈이다. 막상 나오긴 했는데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연락할 길이 없어 막막했다. 

속는 셈 치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온다. 온다. 온다.’ 하염없이 도로만 보며 텔레파시란 걸 보냈다. ‘오고 있다. 오고 있다. 오고 있다.’ 차가 올라오는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안 온다. ‘왔다. 왔다. 거의 다 왔다.’ 길가에 서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이 어이없었다. 한 번씩 왔다 갔다 할 거라던 사람이 안 온다. 길이 엇갈릴까 봐 어디 가 있지도 못한다. 계속 서 있다 보니 허리도 아프다. 


그때 비둘기 떼가 반대편에서 우르르 날아왔다. 으악 하면서 멀찍이 떨어졌다. 중학생 때, 학교 운동장에 비둘기 집이 있었다. 3년 내내 비둘기 떼를 많이 봤다. 살아 있는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안타까운 생의 끝도 많이 봤기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비둘기들이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나도 점점 더 옆으로 밀려 올라갔다. 그러다 푸드덕거리며 날아가 버렸다. 그 움직임에 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텔레파시 보내라며! 이런 황당한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하다가 이걸 글로 쓰면 웃기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생각을 하니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진료 본 시간을 훨씬 넘어 한 시간째 길거리에 서 있었다. 웃음을 참았다가 붉으락푸르락했다가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일 때쯤 우리 차가 보인다. 기다리는 동안 다짐한 게 있다. 절대 화내지 말자. 다시 한번 되뇌며 차에 탔다. 남편이 많이 기다렸냐고 묻는다.


“텔레파시 보내라면서요~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진료 들어가자마자 바로 보고 나왔는데!” 

“아. 어쩐지. 일찍 끝날 거 같더라! 뭔가 신호가 온 거 같았는데, 무시했어.”

“무시했다고요?! 허. 참. 텔레파시 보내라며!”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뭔가 오는 거 같았는데 애들이랑 공원에서 좀 논다고…. 근데 텔레파시 보내라고 했다고 믿고 보내는 너도 웃기다. 크크크.”

“아니! 내가 핸드폰 준다고 해도 선배가 텔레파시 보내라고 했잖아요! 그래 놓고 무시했다고?! 아 진짜! 말을 왜 그렇게 해요! 내가 기다리면서 화 안 내려고 했는데!”




© pavstyuk, 출처 Unsplash



남편의 한마디에 참았던 화가 터져버렸다. 남편은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서운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웃음을 참으며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아무 말이나 한다. 뒤에 앉은 나도 겉으로는 화난 상태를 유지하면서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글로 꼭 담아내겠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지 않았다. 


목소리가 커지자 아이들은 엄마, 아빠 싸우지 말라고 말한다. 남편이 선우, 윤우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설명의 끝에는 모든 게 전화기를 가져오지 않은 아빠 잘못이라 말했다. 그러고는 아빠랑 텔레파시 연습해 보지 않겠냐고 아이들과 생각한 거 맞추기를 한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뒤로 남편은 한동안 텔레파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아이들이 말하더라도 급하게 막으며 나를 돌아본다.

“쉿! 그 말 쓰면 엄마 화낸다!”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내가 다 글로 쓸 거야! 선밴 내 글감이에요!”


내 글감의 대부분은 남편과 아이들이다. 나와 성향이 반대인 남편은 내가 이해 못 할 행동을 많이 한다. 엉뚱하고,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나도 같이 동조하고 있다. 텔레파시 사건처럼 말이다. 그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당시에는 분명 서럽고, 내가 바보 같고, 화도 나고,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 감정이 ‘글쓰기로 이 마음을 승화시킬 거다!’라는 생각 하나에 싹 사라졌다. 글쓰기의 놀라운 힘이다. 

상황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화낼 일도 서운할 일도 아니다. 그저 우리만의 웃을 추억 하나가 더 생겼을 뿐이다. 모든 걸 글감으로 보면 일상을 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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