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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진 Mar 26. 2024

본캐와 부캐



© debbyledet, 출처 Unsplash



‘부캐’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유재석이 <놀면 뭐 하니?>라는 프로그램에서 유산슬로 활동하면서 이 단어를 접했다. 처음에는 생소하고 혼란스러웠다. 유재석이면 유재석이지 유산슬은 뭐지? 내가 나인데 내가 아닐 수가 있나? 연기하는 거로 생각해야 하나? 부캐릭터도 나인가? 이 단어가 익숙해질 즈음 궁금했다. 내 본캐(본 캐릭터)와 부캐(부 캐릭터)는 무엇일까?      


20대의 절반을 결혼, 임신, 출산, 육아로 보냈다. 친구들은 사회 초년생 티를 벗고 직장에서 경력을 쌓아나갈 때였다. 나의 사회 경험은 사회 초년생에서 멈췄지만, 엄마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결혼 전엔 일상이었던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언제든 영화 보러 갈 수 있고, 여행 가고, 친구 만나고, 카페에 갈 수 있는 자유. 이 자유는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으로 미뤘다. 육아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큰 혼돈을 안겨준 동시에 많은 변화와 의미도 함께 안겨 주었다. 연년생 아들 엄마가 될지도 몰랐는데 삼 남매 엄마가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블로그에 아이들 육아 이야기를 기록해 오고, 글도 계속 써 왔기에 본캐가 엄마라면, 부캐는 글 쓰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게 본캐이고 부캐인지 확실히 구분 지어지지 않을 만큼 부캐가 자리하는 부분이 커졌다. 어느새 엄마이자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엄마’ 자리가 줄고, ‘글 쓰는 사람’이 더 커질 날이 올 거라 믿으며 살고 있었다.                




© lilartsy, 출처 Unsplash



그러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또 한 번 깊이 하게 되었다. 《명상록》을 꾸준히 필사해 오고, 글쓰기와 나 사이에 대한 고민을 매일 해 와서 인듯하다. 나도 모르게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본캐와 부캐의 구분 없이 그냥 나로서 존재할 수는 없을까?      


한 달 전, 오랜 고민 끝에 5년 동안 쓴 블로그 닉네임을 바꿨다. 닉네임은 나의 또 다른 자아라 여기기에 신중하게 정하고 바꾼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떠한 수식어도 없이 내 이름 석 자로 바꿨다. 계속 글을 써 오면서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아가 더 강해졌다. 내 이름이야말로 가장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본캐와 부캐의 구분 없이, 어떠한 수식어도 없이 오롯이 나로 존재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작가만의 색이 묻어나고, 독자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진실한 글이다. 진실, 진심 역시 내가 추구하는 순수성을 품고 있는 단어다. 내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진실하고 진심이 담긴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가? 내 이름을 볼 때마다 떠올리기 위해, 글에 대한 마음, 글을 대하는 마음이 내 이름 석 자에 담기기를 바라면서 닉네임을 바꿨다.         




© parabol, 출처 Unsplash



아이들이 커 갈수록 경제 활동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다시 간호사로 일을 할지, 계속 글을 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에 대한 답은 물을 때마다 쉽게 나왔다. 글을 계속 쓰고 싶었다. 문제는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느냐다. 묻고 또 물어도 막막했다. 책 인세로만 생활할 수 있는 작가는 몇 안 된다는 것도 잘 알뿐더러, 글만 써서 살기는 힘들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게 묻고 묻는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글쓰기 선생님을 해보면 어떨까? 란 물음이 떠올랐다. 큰 돌멩이 하나가 쿵 던져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고등학교 2학년 때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처음 품었을 때처럼, 아이를 키우며 책을 읽다가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 처음 생각했을 때처럼 가슴이 설렜다. 새로운 꿈을 찾은 순간이었다.      




© awcreativeut, 출처 Unsplash



글쓰기를 좋아하고, 이렇게 글을 쓰며 살고 있는 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들었던 글쓰기 수업도 한몫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네 명과 일주일에 한 번, 집을 돌아가며 글쓰기 수업을 받았었다. 낯선 친구네 집에서 상 하나에 둘러앉아 글을 쓰고, 발표하고, 얘기를 듣는 조용한 저녁 시간이 좋았다. 잘 썼는지는 모르지만, 과제만큼은 성실히 해가는 학생이었다. 


수업 때 칭찬 스티커를 붙여주는 나무 그림이 있었다. 나무가 스티커로 가득 차면 선생님이 뒷면에 빼곡하게 손 편지를 써주었다. 그리고 코팅된 칭찬 나무와 함께 작은 선물을 주었었다. 선물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무와 선생님의 손 편지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만약 내가 아이들에게 책 읽기와 글쓰기의 재미를 알려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된다면 어떨까? 나도 누군가에게 독서와 글쓰기의 재미를 일깨워 줄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았다.     


다른 일을 하면서 글쓰기를 이어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내 성향과 특성으로 봤을 때, ‘간호사로서의 나’와 ‘엄마로서의 나’ 사이에 ‘글 쓰는 나’는 자리가 점점 줄어들 게 뻔했다. 글쓰기 선생님이라는 새로운 꿈을 품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글쓰기라는 내 직업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다. 글을 놓고 싶지 않아서, 글과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다. 내가 글쓰기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을 찾은 것이다.

본캐와 부캐의 구분 없이 ‘나=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뭐든 읽고 쓰는 삶으로 통한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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