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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덕현 Nov 18. 2024

'기생충'과 나의 반지하

- '기생충'과 '설국열차'의 시스템 그 바깥으로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 뭐야 그거. 아 그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 아, 아니다. 그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그거 있지? 그런 거랑 비슷해. 암튼 그 양반. 전반적으로 말이나 행동이 선을 넘을 듯 말 듯하면서도 결국엔 절대 선을 안 넘거든. 그건 좋아. 인정.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 냄새가 씨. 차 뒷자리로 존나게 넘어와 냄새가, 씨, 쯧.... 가끔 그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있어. 그런 거랑 비슷해." - '기생충' 중에서


반지하는 습도가 다르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아서다. 습한 공기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난다. 옷을 빨아 말려도 눅눅해져 특유의 그 냄새가 묻어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그곳에서 살다 보면 그 냄새 또한 익숙해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는 그것을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지하철 냄새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간 반지하의 냄새고 다른 말로 하면 도시 저소득층의 냄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생을 빙자해 소설을 쓰고 있었을 때 역삼동의 반지하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방 한쪽 위로 나 있는 작은 창 하나가 유일하게 바깥공기와 빛을 방 안으로 들여주는 통로였다. 낮이면 지나는 사람들의 발이 보였고, 때때로 취객이 오줌을 누거나 토를 하는 일들도 있었다. 그 경험 때문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봤을 때 그 공감은 유독 컸다. 기택(송강호)이 반지하의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그 처연한 표정이 너무나 가슴에 와닿았다. 창에 쳐진 철창은 외부인들로부터 그 안에 사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지만, 그 장면에서처럼 그건 마치 내부인들을 그 철창 안에 감금해 놓는 장치처럼 보였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반지하 살이는 그 공간적인 불편함만큼 사라지지 않는 습기의 불쾌함도 힘들었다. 햇볕이 거의 들어오지 않으니 빨래를 해서 널어도 잘 마르지 않았고, 마른 후에도 습기가 머금은 갖가지 냄새들이 옷에 배기 마련이었다. '기생충'에서 박사장(이선균)이 운전기사로 일하게 된 기택의 몸에 밴 냄새를 척 알아채고 “이게 무슨 냄새지?”하고 묻는 장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도 바로 그 공감이 유독 컸기 때문이었다. 마치 세상은 민주화되었고 그래서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는 걸 바로 그 냄새가 증명해내고 있었다. 빈부에 따라 사는 공간이 달라지고, 그래서 그 공간의 냄새를 머금은 사람들은 선을 넘을 수 없는 어떤 보이지 않는 경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반지하에서 살 때 옆방에 살아서 친해진 이웃 청년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도 우리가 아무런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던 건 같은 공기를 같은 냄새를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어서였다.

 

유난히 마른 체구에 얼굴색이 검었던 이웃 청년은 그것이 햇빛을 잘 보지 못해서라고 했다. 새벽까지 술집에서 일했기 때문이었다. 술을 관리하고 내주는 일을 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거의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아침 즈음에 들어와 해장을 하고 낮 내내 잠을 자기 일쑤였다. 그러니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일하러 나가는 그가 햇빛을 볼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는 낮에 자는 일 때문에 반지하가 자기에게는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그나마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거였다. 같은 반지하에 살고 있었지만 그 청년의 삶은 사실상 빛 볼 일 없는 지하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지하실 남자에서 이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지하는 재난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물난리가 나면 흘러내려온 물이 차올라서 방안까지 침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때 한강으로 내려가는 하수도가 막혀서 역류하며 서울에 홍수가 났을 때 반지하에 사는 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발을 내렸는데 ‘철벅’하더라”는 이야기는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이 진짜 현실이라는 걸 물난리 때 거의 방까지 막 넘어오려는 물살을 겪으며 실감했다. 그때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하수도 쪽에서 바퀴벌레 같은 해충들이 저들도 살기 위해 올라오는 광경이었다. 


'기생충'에서 갑작스러운 폭우로 여행을 떠났던 박사장네가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그 저택이 마치 자기 집인 양 술 마시고 놀던 기택의 가족이 어두운 상 밑으로 숨는 장면에서 빵 터진 이유도 그때의 그 경험 때문이었다. 슬금슬금 그곳을 빠져나와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뚫고 저지대에 있어 물이 차오르고 있는 반지하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기택네 가족의 모습은 마치 바퀴벌레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고, 그들이 다시 돌아간 자신들의 반지하 집에 차오르는 물은 잠시간 “이것도 살만해”라고 여겼던 그들의 판타지를 현실로 되돌려놓는 것이었다. 

'기생충' 흑백 스틸

하지만 반지하의 삶이 '기생충'의 냉소적인 시선처럼 차갑기만 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 이웃청년이 업소에 나가지 않는 저녁이면 우리는 브루스타에 프라이팬을 얹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의 삶과 나의 삶은 너무나 먼 거리에 놓여 있었지만 우리는 그다지 서로를 경계하지 않았다. 소설을 쓰면서 입에 붙은 담배 때문에 방은 늘 그 냄새로 가득했는데, 이웃청년은 컴퓨터 앞에 담배를 물고 글을 쓰고 있는 내 방 문지방에 앉아 두런두런 전 날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곤 했다.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곳에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편안해졌다. 즉 삶이란 그곳이 반지하든 지하든 간에 살며 익숙해지다 보면 그러려니 살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다 그 익숙함이 깨지고 자신이 도시 저소득층의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생겨난다.


몇 년 전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서울의 빌라 반지하가 침수돼 일가족 3명이 사망한 사건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이 사건은 '기생충'의 이야기가 그저 영화적 허구만은 아닌 현실이라는 걸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물론 너무 빠른 순간에 불어난 물 때문에 벌어진 참변이긴 하지만, 과연 반지하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주거 공간(물론 지하를 포함해서)이 과연 정상적인 삶의 공간인가 하는 의구심을 그제야 새삼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애초 반지하는 박정희 정부시절 북한의 공습이나 시가전에 대비하기 위한 지하 공간을 의무화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가난한 이주자들이 반지하를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주거공간으로 변모했던 거였다. 


'기생충'이 공간으로 나눠 보여주는 반지하와 지상 그리고 지하는 봉준호 감독이 찾아낸 우리 사회의 계급구조를 잘 보여준다. 어떤 주거공간에서 살아가는가가 그 사람의 계급을 결정한다. 물론 머리에 계급장이 달려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저 박사장의 말처럼 '냄새' 같은 삶이 묻어난 흔적들이 차이를 만들고 폭우 같은 재난 상황은 지상과 지하의 삶을 적나라하게 대비해 놓는다. 폭우가 쏟아져도 지상에 살아가는 이들은 텐트를 치고 낭만을 이야기하지만, 지하생활자들은 삶의 공간이 쓸려내려 간다. 때론 삶 자체도. 

'기생충'

이 계급 구조는 '기생충'에서 기택네 가족이 하나 둘 박사장네 집으로 스며들어 '기생'하며 살아가게 되는 '원대한 계획' 같은 욕망을 만들어낸다. 한국 사회가 그토록 짧은 기간에 압축 성장을 해낸 동력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삶이 지하와 반지하 그리고 지상으로 구분되고, 그래서 그곳에 사는 이들은 저마다 상향된 욕망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된다. 지하에 사는 이들은 어떻게든 반지하에 살려하고, 반지하에 살던 이들은 지상을 꿈꾼다. 지상에 사는 이들은 이제 점점 더 높이 올라고 펜트하우스에서 살기를 욕망한다. 이 끝없는 욕망의 위계가 한국사회가 압축성장하는 강력한 동력이 됐던 거였다. 


'기생충' 같은 시스템을 계급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이제는 생겨났고, 나아가 더 이상 지하에서 반지하로 또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가는 성장의 사다리가 좀체 보이지 않는 현실을 맞이하면서 한국사회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지하의 삶은 지하에, 반지하의 삶은 반지하에 그리고 지상의 삶은 지상에 고착되어 버린 '수저계급'의 사회는 당연히 그 시스템 바깥으로 나갈 돌파구를 찾아보게 하기 마련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공고한 자본 계급의 시스템 문제를 일찍이 '설국열차'를 통해 그린 바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

꼬리칸에 있던 모두가 머리칸으로 가기 위해 앞으로 난 문을 어떻게든 뚫고 나가려 안간힘을 쓰지만, 머리칸의 절대권력자 윌포드(애드 해리스)를 만난 꼬리칸의 리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그것 역시 이 무한궤도를 돌고 있는 열차가 가진 시스템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되고는 절망한다. 그저 앞으로 가는 문만이 해방의 길이라 여기는 커티스에게 남궁민수(송강호)는 말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이런 문이 아니라 이쪽 문을 여는 거야. 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들 말이야.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붙은 채로 있다 보니까 이게 이제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지. 그래서 이쪽 바깥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이 얘기야.” - '설국열차' 중에서


지하에서 반지하로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가는 그 욕망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한국이라는 열차에서 이제 그 앞으로 가는 문이 아닌 옆문을 뚫고 나가려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 물론 그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지만, '설국열차'와 '기생충'의 끝이 보여주는 것처럼 파국이든 폭우든 어떤 커다란 계기를 마주하게 되면 생존을 위해 선택해야 할 대안이다. 알고 보면 모두가 같은 욕망 속에서 도시로 도시로 몰려오며 생겨난 열차이고 반지하가 아니던가. 서울 외곽에서 반지하가 아닌 지상에서 사는 삶이 나쁘지 않다. 가끔 천변을 걷기도 하고 산을 오르기도 하는 조금은 느긋한 그 삶이.

202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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