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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Jan 02. 2024

[물결표] 두 번째, 하다 : 불완전한 언어

뉴질랜드 워홀기, 두 번째

내가 처음으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때는 나도 기억도 안나는 아주 어렸을 때, 엄마의 기억 속에 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박물관을 갔었고 그녀가 잠깐 길을 알아보러 간 사이에 나는 있어야 할 곳에서 사라졌다. 엄마는 놀란 마음을 내릴 새도 없이 조용한 박물관에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나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영어 해보세요. 말해보세요. 스! 픽! ‘ 

양갈머리와 멜빵바리를 입은 아이가 한 외국인의 다리를 붙잡고 다그치듯 말하고 있었다.

‘ 할로 쏘리 쏘리 쏘리 하은아 이리로 와 얼른’ 

엄마는 유일하게 아는 영어였던 안녕과 미안을 거듭말하며 나를 붙잡아 데려왔다고 말했다. 그때는 언어 천재인 줄 알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영어를 국어와 대등한 과목으로 간주하는 한국에서, 내가 영어를 유치원 때부터 접했다고 말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때까지는 교육과정에선 말하기보다 읽기를 쓰기보다 듣기를 중요시했다. 그랬기에 정작 영어 점수가 높은 한국인이 외국인과 소통하려고 하면 하나도 말을 못 한다는 비판의 여론도 있었고 나 또한 그랬다. 

그렇다고 지금껏 외국인들과 의사소통을 아예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몸짓, 발짓을 통한 대화는 세계 공용어였고, 더 깊은 이야기를 할만한 외국인에게 없어 그럭저럭 불편함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경험할 수 있었던 폭이 좁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깨달은 이후부터 영어를 말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 크게 생겼다. 그 이후로 회화학원과 언어 교환을 틈틈이 했고 외국인이 많이 오는 브루어리에서 일한 덕에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통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다. 지극히 찰나의 대화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타 언어로 대화한다는 것은 나에게 탈피 이상의 것, 어쩌면 자아의 해체까지를 요구했다. 


한국에서 초면에 만난 사람과 주절주절 수다를 떨던 순간이 나에게도 분명 있었다. 물론 지금도 내 심연 속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적절한 질문과 적당한 공백, 담백한 대답의 삼박자가 맞으면 낯설어하던 경계는 풀어지고 서로의 우주에 서서히 스며드는, 그러면서도 그 대화를 3자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그런 순간에 쾌감을 느끼는 시절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절이 무용하게 뉴질랜드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아니 영어라는 불완전한 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런 나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상대방의 물음에 내 대답 대신 0_0? 와 공백이 생기고 내 물음에 이해 못 해?_? 와 다시 물어보는 반문이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용한 언어였고 나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러한 소통의 오류들이 모국어를 사용하는 그들이 아니라 모든 게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쉽게 미안해하고 금세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면서 심장이 쿵쾅거리고 그 소리를 따라 대화가 엉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완전한 발화는 마음 상태를 한동안 어지럽혔는데 쉽게 단절됨을 느꼈고. 우열에서 밀려나 추락하는 기분을 맞볼 때도 많았다. 점점 사람들이 많은 모임에 가기 전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무언가를 말하기 전부터 할 말을 되새기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기도 하고. 대화가 끝나면 꼭 순간을 곱씹어서 혼자 얼굴이 벌게졌다가 하얘졌다가를 반복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럴수록 당당해지자고다독였지만 의지와 다르게 마음이 자꾸 움츠려졌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뉴질랜드 친구가 두 명이 살았다. 그중 한 명은 외국인과 대화를 한 번도 안 해 본 토종 뉴질랜드 사람이었다. 그와 대화할 때는 꽤 힘들었는데 그것은 비단 그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종종 그가 대화를 포기하는 게 눈에 보여서였다.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몇 번이나 못 알아들었음의 의사를 표현해도 그의 대화 속도는 여전했으며 표현도 일관됐다. 그러다 그는 대화를 포기하고 한숨을 쉬며 뒤돌았다. 그 너머에는 한없이 작아진 내가 있었다.

반대로 내가 난감한 상황도 있었다. 같이 일하는 친구에게 곤란한 일이 발생해 내가 운을 떼야할 때 그리고 그 대화를 이어갈 때었다. 내가 말하는 말이 담긴 어조와 감정이 불확실하거니와, 상대방의 반응 또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 팀원들은 여러 국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따라 문화 차이가능성도 열어둬야 하기 때문에 단번에 결론을 내릴 수 없어, 더 곱씹고 곱씹어 보는 습관도 다시 생겼다. 그럴수록 스스로 진실된 마음을 계속해서 보여줘야 한다고 되새겼지만 단기간에 보여주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느 날은 낯선 감정에 못 이겨 일을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괜히 눈물이 주룩주룩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보다 가장 나를 조여왔던 것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내 입으로 말하는 영어가 내 마음을 온전하게 표현하고 있느냐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내 모든 감각이 한국어로 된 단어의 표상이 그대로 영어로 표현했을 때의 표상과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말할 때마다 마치 더빙판 영화의 성우처럼 말은 문맥상 맞지만 구현할 수 없는 어색함이 존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일차적으로 모국어를 통한 발화도 완전한 편이 아니였다. 결국 말한다는 것은 무한대의 튀고 튀는 생각들을 고작 몇 문장으로 바꾸는 과정인데, 이는 어찌 보면 흐르는 물을 사회화된 용기에 담아서 그 자체를 형태로만 풀이하는 것과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2 외국어로 소통하는 것은 금이 간 조각들을 얼추 용기 모양으로 만든 것에 불과할뿐더러 모든 언어에는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역사와 현 사회가 담겨있기에, 단순한 변역으로는 온전히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쩌면 제2 외국어로 최대 완전 발화는 내가 이 언어에 스며들고 마음으로 연결되어야 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곳에 지낸 지 세 달이 지난 지금, 다행히도 전보다 큰 이질감이 안 들지만 대신 나도 모르게 툭 불완전한 언어로 발화할 때마다 또 다른 나가 됨을 인지한다. 특히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영어 단어들을 사용할 때면 나는 그 사람이기도 그 사람이 아니기도 한 내가 된다. 아직은 이렇게 분명하지 않은 내가 좋으면서도 쉽게 목구멍이 간지러워짐을 느낀다. 


돌이켜보면 일찍이 사람은 필연적으로 낯선 세계에 접하게 된다. 울음을 그치고 소통을 하기 시작할 때, 나의 언어에서 벗어나 타인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이다. 그 시기에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자아’가 부서지는 대신 그 기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성립된 자아에서 타언 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수용하고 다시 재정립된 자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럴 때 보면 인간이 참 환경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나약하구나 싶으면서도 최대한 긍정한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있다는 점이 꽤 매력적이다. 더불어 나 같은 경우는 같이 사는 친구인 테일러, 마리 그리고 같이 일하는 친구들을 통해 문장을 배운다. 그렇기에 쉽게 그 친구들의 언어 습관을 따라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는, 발화하는 그 순간에 테일러, 마리 그리고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섞인 내가 된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내뿜는 에너지 안에 내가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이 이뤄져 있다는 남모를 연대감과 든든함에 괜히 마음이 따스해지기도 한다. 


어느 논문에서 ‘낯선 외국어를 배우고 말한다는 것은 모국어와 다른 가능성, 하나의 언어에 고착된 제한된 사고에서 벗어나는 해방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새로운 외국어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하나의 관계 맺기가 아닌 다 양한 관계 맺기를 가능하게 해 주고 기존의 관계 맺음을 의문시하는 계기를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즉, 낯섦, 이방성은 작가에게 글쓰기의 창의적이고 자극적이고 긍정적인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언어의 익숙함의 상실은 낯 선 세계 혹은 이제까지 인식에서 배제된 세계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준다.’라는 말을 본 적 있다. 어쩌면 이러한 불완전함은 또 다른 자유로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roys peak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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