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첫째주, 은희 : 뜨겁든 미지근하든

봄호 첫번째 주제 : 사랑

by 어느 저자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결혼 소식을 들었다. SNS상으로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의 결혼, 임신, 육아의 소식을 간간이 듣지만 그게 딱히 내 일 같지는 않았다. 얼마 없는 내 주변 사람들의 일 역시도. 그런데 며칠 전 그 생각이 무너져버렸다. 십년지기 친구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애써 부정했지만 결혼을 한 번쯤 생각해볼 나이가 됐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져 씁쓸하기도 하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또 다른 관문을 넘어야 하는 친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


나의 물음에 웃음기 가득하던 친구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응, 잘 살 수 있어.”


흔들리지 않는 눈, 말투, 감정. 어찌 그리 확신할 수 있을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오랜 세월 각자 살아온 남과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함께해야 하는 일이지 않나. 3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거라는 친구의 말에 마음속 깊이 숨겨둔 판도라 상자가 열려버린 기분이었다. 애초에 한평생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한 일인가?



24살 여름, 결혼할 뻔했다. 그때의 나는 닥쳐온 결혼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남자친구가 매번 부모님에게 결혼이라는 압박감을 받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결혼할래?”라는 말을 들었나 싶을 정도로 당연한 상황이었다. 결혼 적령기가 돼버린 남자친구, 아들의 결혼을 바라는 남자친구의 부모님, 2년이라는 연애 기간, 둘 다 직장생활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곳에 나의 나이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 24살이면 뭐, 더 어린 사람들이 결혼하는 경우도 많은걸...

조금의 위압감이 든 건 그날부터였다. 모아둔 돈도 많지 않고 그렇다고 부모님 손도 빌리고 싶지 않고, 하필 임금체불 때문에 조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보니 결혼을 나중으로 미루자는 나의 말에 대출받으라던 남자친구의 대답. 내가 왜 빚까지 내면서 결혼을 해야 하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표현하지 못했다. 처음 뵙는 남자친구 부모님과의 대화가 오로지 결혼 이야기밖에 없었음에도, 나의 부모님과 남자친구가 마주 앉아 식사하던 그 분위기가 몹시 불편했음에도, 엄마와 언니가 결혼을 말렸음에도, 아무 표현도 하지 못했다.


결혼 안 하면? 딱히 어떻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없잖아? 어차피 언제가 결혼할 거 지금 한다고 뭐가 달라져? 이미 서로 첫인사까지 드린 마당에 이제 와서 뭘 어쩌게?


그때의 나에게 결혼은 삶의 포기와 같았다. 잘 살아갈 자신은 없었고 그렇다고 죽을 자신은 더더욱 없었기에, 그냥 남들처럼만 살자는 마음이었다. 남들처럼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늙어가자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을 걸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수록 이 길이 아니라는 거부감이 끊임없이 올라왔음에도, 되돌아갈 수 없었다. 앞이든 뒤든 그게 그거였으므로. 그때의 나는 그냥, 그랬었다.


그런 내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던 방법은 여행이라는 핑계 덕분이었다. 우연히 만난 또래의 여행자들을 보고 지금 결혼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아까워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앞도 뒤도 아닌 아예 다른 곳으로 도망칠 기회가 생긴 그런 핑계. 그 핑계가 당연하게 헤어짐이 돼버린 사실에 안도했다. 그때 당시 남자친구에게도 난 그저 오래 사귀어 결혼할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말 지독히도 다행이었다. 사실 그 핑계를 정말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겉으로나마 매정한 년보다는 이기적인 년이 나았으니까. 지금 와서 말하지만, 난 당신을 더는 사랑하지 않았다. 당신과 결혼해서 잘 살 자신 또한 없었다.



이제 남들이 말하는 결혼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은 더더욱 멀어진다. 나의 연애는 항상 미적지근했다. 초반에는 호기심으로 인해 잠시 불타오르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적지근한 연애는 ‘내가 과연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라는 의문만 품게 했고, 그 끝은 항상 좋지 못했다. 몇 번의 연애를 지나 이제는 이 미적지근한 온도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나의 온도라는 걸 조금은 받아드리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씩 드는 의심은 어쩔 수가 없다. 연애도 이런데 평생의 동반자가 생기는 결혼은 오죽하랴.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해서 잘 살 자신 또한 없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저것도 전부 사랑에 대한 편견 때문에 생긴 고민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불타올라야 한다, 사랑을 하는 자들은 눈이 멀어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 같은 사랑에 너무 노출되어있다. 운명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상대방과 결혼해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런 영화 같은 사랑. 그런 사랑이 존재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더 다양한 사랑이 존재한다. 내 미적지근한 사랑도 그중 한 가지의 사랑일 테지. 24살의 내가 이 사실을 일찍 깨닫고 인정했다면, 나는 그때와 다른 선택을 했을까? 그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아갈 자신이 있었을까? 글쎄, 몇 번을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을 것 같다. 미적지근한 사랑도 이미 떠나가 버린 지 오래였고 그저 질질 끌고 있던 연애였다. 지금 다시 되돌아봐도 역시 결혼은 하지 않길 잘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길, 아직은 쌀쌀하지만 퍽 포근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느덧 몸을 움츠릴만한 추위는 지나가고 봄이 훌쩍 다가와 버렸다.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지나온 세월이 느껴져 놀라곤 한다. "우리 벌써 만난 지 10년이나 됐어!"라며, 마음은 언제나 순수했던 고등학생으로 머물러있는 것만 같은데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이런 마음은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여전하겠지. 그때의 우리는 어쩌고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사랑을 하고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뜨겁든 미지근하든.



from.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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