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둘째주, 은희 : 나를 잊어가는 여정

봄호 두번째 주제 : 방랑

by 어느 저자

그러니까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 어디쯤이었다. 꿈인데 현실로 자각하고 있던 중이랄까. 자는 도중 나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듣다 보니 꿈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굳이 깨지는 않았다. 그 대화 중 누군가가 한 말이었다.


“은희 언니가 부러워요. 자유롭잖아요. 저는 그 밤하늘을 봐도 예뻤지만 한국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슬프던걸요.”


대화가 끝나고 진짜 잠에서 깨어났는데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끝도 없이 펼쳐진 은하수였다. 생각해보니 얼마나 비현실적인 상황인가.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리고 땀을 식혀주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까아만 밤하늘에는 누군가 일부러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빼곡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곳에 누워 잠들고 있다니. 아, 아닌가. 난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까슬까슬한 모래의 감촉만이 현실이라 일깨워주고 있었지만, 역시 믿기 힘든 밤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문득 믿기 힘든 순간들이 찾아온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광활한 풍경을 마주했을 때가 대부분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시간 속에서도 그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을 때였다. 전날 동행들과 과음을 한 탓에 아침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온종일 숙소에서 쉬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이스탄불 마지막 날이라 체크아웃을 해야만 했다. 야간버스 이동이라 저녁까지 시간이 붕 떠버린 상황. 동행 S는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에 관광지를 둘러봐야겠다고 말했지만 차마 따라갈 수 없었다. 숙취가 해소되지 않은 나와 K는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적당한 나무 그늘을 찾아 담요를 깔고 누워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한참 하늘을 보며 멍을 때리는데 순간 내가 이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그 사이로 보이는 햇빛과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 주변에서 들리는 재잘거리는 새 소리와 사람들의 수다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아, 평화롭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이 이리 여행으로 가득 찰 줄 몰랐다.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여행 기간이 길어질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 여행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한국을 벗어나는 것’ 이었기에, 여행의 시작과 동시에 여행의 목적을 이뤄버린 나는 남들보다 조금은 더 자유로운 편이었다. 머물고 싶으면 머물렀고, 떠나고 싶으면 떠났다. 통장에 있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기나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여행을 떠났다고 마냥 매 순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떠한 경험도 어떠한 풍경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진 그 생활 속에서 문득 이질감이 느껴질 때, 그 순간엔 발끝에서부터 파도가 몰아치듯 충족감이 차올라왔다. 아, 나는 진정으로 벗어났구나. 온몸을 옥죄어오는 현실이라는 압박감에서 비로소 해방되었구나. 아아, 나는 지금 자유롭구나.


정해진 패턴이 있다. 12년간 대학이라는 목표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그리고 그 이후론 가정을 꾸리고 노후를 보내야 하는, 누가 정한지도 모르는 그 패턴을 따라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그 패턴에서 조금만 엇나가도 현실이라는 가혹한 곳은 문제아, 실패자로 몰아가기 바빴다. 불편함이 올라왔다. 오로지 수능을 위해 하루 15시간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야 했던 시절도, 하고 싶은 게 없는데 아무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을 들어갔던 시절도, 유명한 대기업이 아닌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던 시절도. 어렸을 때부터 사회의 기대감에 점점 부합하지 않는 내 인생이 감옥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열심히 살아오지 않은 내가 사회의 탓을 하는 것이라며 비난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건 꼭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매일 밤 현실이라는 감옥은 학벌, 직업, 재산 등 다양한 괴물들을 만들어 나를 비난하고 사라졌고, 그 감옥에서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나를 실패자로 몰아가는 ‘나’라는 괴물이 존재하는 그곳에서는. 그렇게 나는 잠시나마 탈옥을 감행한 것이다.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던 여행자의 삶은 자유 그 자체였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고, 누구도 나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양한 괴물들도 여행자로서 존재하는 나에게 다가올 수 없었다. 내가 이 낯선 타지에서 소리를 지르며 운다 해도, 꽃을 달고 춤을 춘다 해도, 심지어 자살을 한다 해도,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묘한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목적 없는 긴 여행을 방랑과 비슷하다고 표현하곤 한다. 만약 방랑이 끝없는 선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상을 무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말할 것이다. 잠시나마 방랑을 했노라고. 비록 세상을 등져 도망친 곳이었더라도, 어느덧 그 무의 공간이 소름 끼치게 두려워 또다시 도망을 쳤더라도, 그럼에도 나는 잠시나마 방랑 속에 존재했다고.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에서 나오는 문구를 빌려 말해보자면, 나의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기 위한 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from.은희

keyword
이전 06화[봄호] 둘째주, OHMJ : 방랑의 방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