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두번째 주제 : 방랑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리스의 작은 섬, 로도스의 선착장에 걸터앉아 석양을 바라볼 때였다. 거대한 헬리오스 석상이 있었다는 자리엔 그저 무언가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터가 존재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자꾸만 범람하는 파도가 조금이나마 남은 흔적을 지워가고 있었다.
당시 나는 떠도는 삶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같이 다른 곳에 몸을 누이는 일, 어떤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까 고민하는 것, 밤샘 이동을 하는 일, 소매치기나 보이지 않는 위협에 경계하는 일. 안정된 삶을 걷어차고 나온 방랑자의 혹독한 현실 속에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일은 그리운 사람들과의 일상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가령, 가족들과 작지만 배부른 식사를 함께하고 아무렇게나 틀어둔 티브이의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밤새 수다를 떠는 일이나, 할머니의 손을 잡고 부둣가 한 바퀴를 돌며 시답잖은 질문을 던지는 일처럼 작은 일상의 그리움에 젖어있었다. 일상의 가치는 향기와 같아서, 있을 땐 느끼지도 못하던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내음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익숙한 장소, 가장 편한 사람들,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처럼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나의 존재 또한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수 많은 일상들이 살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저 그곳에 불시착한 이방인이었다.
자유와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아주 잘 익은 열매처럼 달콤했지만, 그 열매가 선악과였음은 베어 물었을 때야 깨달았던 것이다. 지나치게 달콤한 것들이 그러하듯, 방랑의 무게 또한 전혀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여행을 위해 내려놨던 많은 것들의 무게를 깨달았던 건 그 열매의 달콤함이 무뎌질 때쯤이었다.
안정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디세우스가 집에 가기 위해 에게해의 그 수많은 역경을 헤쳐나갔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느끼면서, 이대로는 나 또한 이 여정이 결국 집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프라하에서 한인 민박 스텝으로 지내기로 했다. 프라하에서 한 달간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머무르는 이방인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확실히 프라하에서의 일상은 방랑과는 거리가 먼일이었다. 더 이상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머무는 공간과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과가 존재했다. 아침이면 푸짐하게 차려진 한식을 먹고는 정이 채 들지도 않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떠나는 일보다 떠나보내는 일이 잦아졌다는 점도 일상을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매일 같이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얕은 만남을 정리해나가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이 끝나면 좋아하는 골목으로 나갔다. 주로 숙소에 머물 때가 더 많았지만, 하루에 한 번은 꼭 산책을 했다. 블타바 강을 옆으로 끼고 걷다 보면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또 다른 이방인들을 목격하곤 했다. 분주히 식당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카를교 위에서 버스킹을 준비하는 일상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걸 배경으로 배낭을 메고, 선글라스를 끼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 두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방인도 아니었으며 원주민도 아닌 존재, 진정 녹아있는 것이 아닌 말 하자면 커피를 내리고 남은 잔여물 같은 존재랄까. 커피라고 말하기도, 아니라 하기에도 힘든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그런 애매한 위치가 좋았다.
어딘가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만으로 여유가 생겼고, 그렇게 생긴 여유는 조금이나마 이방인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참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떠돌고 싶어서 떠나온 여행에서 떠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좋아하고 있는 처지라니. 참으로 오만한 방랑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어떤 손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너는 왜 여행을 떠났어?”
이 질문은 프라하에 있던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설명하곤 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실 나 여행을 왜 떠나왔는지 모르겠어. 요즘 들어, 그만 떠돌고 싶다고 느껴. 가벼운 존재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무거운 가치를 요구하는 일이었어.”
머무는 일에 익숙해지면서 여행을 그만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커져 갔다. 여행을 끝마칠 자신이 없어지는 내가 미웠다. 그토록 꿈꿨던 여행의 끝이 그저 이방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라니,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나조차 기억나지 않는 여행의 이유를 붙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처음 여행을 준비하던 때가 떠올랐다. 사람이 가득 찬 지하철 구석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흘리던 내가 보였다. 미래의 자유를 꿈꾸며, 그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출근하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던 그 순간, 내가 상상하던 것은 여행길에 올라있는 모습이 아니라 돌아오는 길에 올라있는 나였다. 모든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여행을 끝내던 그 순간, 나는 늘 그 순간을 상상해왔었다.
“어쩌면 나는 방랑의 끝을 위해서 방랑하는 것 같아. 그렇잖아. 방랑이란 끝이 있기에 소중한 것이야.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방랑도 무엇도 아닌 거야. 그저 떠도는 것이지. 시작부터 떠돌던 존재에겐 이방인의 무게 또한 없을 거야. 자신의 존재를 아무리 찾아도 떠도는 삶에는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 방랑의 끝을 상상해봐. 모든 여정을 끝내고 내가 온 그곳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을. 내게 방랑이란 늘 그랬어. 방랑을 떠올리면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비행기에 탄 내가 나타나곤 했거든. 그래서 왜 방랑하냐고? 그냥! 하고 싶은 일이잖아.”
마침내 프라하를 떠나면서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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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워크맨 속 갠지스 – 김경주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from.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