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첫번째 주제 : 시작
새해가 밝는다. 모두가 뜨끈한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며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를 부푸는 날이지만, 그 시작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앞날에 대한 설렘보다는 지금껏 무엇도 이루지 못한 나를 책망하는 단어, 나에게 시작은 언제나 그런 단어였다.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도 이루지 못한 과거의 내가 한심스럽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압박감에 점점 숨이 조여올 뿐이다. 공책을 꺼내 빈종이를 펼쳐보았다. 항상 이맘때쯤이면 해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펜을 들고 적어본다.
새해 목표
1. 외국어 공부하기
2. 다이어트하기(운동하기)
3. 독서하기...
도대체 이 목표는 왜 1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걸까. 외국어는커녕 한국어조차 헷갈려 인터넷에 맞춤법 검색하기 바쁘고, 다이어트는 무슨 나의 몸무게는 10년째 큰 변함이 없다. 늘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하겠지만, 10년 전과 다른 점을 말하자면 조금이라도 있던 근육이 이제는 내 몸에 존재할지 의심스러울 정도랄까. 그래도 이 둘과 다르게 독서하기는 나름의 진전이 있는데 말 그래도 나름의 진전이다. 일 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았던 내가 지금은 한~두 달에 한 권 정도는 읽게 되었다. 희한하게 요즘에는 책을 읽는다기보다 서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책을 사서 책을 모으는 행위를 더 재밌어한다는 게 문제다. 내 방안에 책은 점점 쌓여가는데 첫 장도 채 펼쳐보지 못한 책들이 수두룩하다. 여전히 나는 책보다는 만화책이나 웹툰, 인터넷 소설을 더 좋아한다. 그래도 어쩌다 정말 심심할 때(웹툰이나 인터넷 소설이 더 이상 읽을 게 없을 때쯤) 방안에 쌓여있는 책들 중 끌리는 책 하나를 집어 들어 잠시간의 독서시간을 가진다. 이번 목표도 여전히 일주일에 책 한 권 읽기지만 과연 실현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한 달에 한 권도 감지덕지할 정도지.
매년 똑같은 목표를 적어 내려가는 나에게 가끔은 의문이 생긴다. 이 목표의 끝에 있는 사람을 누가 봐도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별 의미 없이 적어 내려가는 것은 아닌지. 그 이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면 지금의 나는 무쓸모의 인간이 된 것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쓸데없는 생각은 곧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비난을 피하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 라는 생각, 그런 내가 더 한심하다는 생각. 생각의 흐름은 흐르고 흘러 더 더 깊은 늪에 빠져버린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홀로 올라가기는 그른 상태가 되어버려 몇 번 발버둥 치다 포기해버렸다. 그래, 내가 이렇지 뭐.
여행 막바지쯤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한인민박 스텝으로 일했을 때가 있었다. 이집트 다합에서 여행의 슬럼프가 찾아와 새로운 여행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고민했던 건 산티아고 순례길을 오를 것인가 아니면 유럽의 한인민박에서 스텝으로 일해볼 것인가였다. 여러 고민 끝에 한인민박으로 결정하긴 했지만 이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움직이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면 당연히 덜 힘들 민박 스텝을 선택할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면서도 내심 기대를 부풀었던 두 달간의 바르셀로나는 결과를 미리 말하자면 그다지 좋은 여행이 되지는 못했다. 광활한 풍경보다는 높디높은 건물들만 가득했던 도시생활도, 무거운 대화를 나누기보다 순간의 재미를 중요시하던 스쳐가는 짧은 여행객들도, 무엇도 내가 원하던 자극이 아니었다.
스텝 생활도 거의 끝나가던 날, 휴무였던 그날은 아침 8시 전에 입장하면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구엘공원에 방문하기로 마음을 먹던 참이었다. 하지만 전날 늦은 체크인으로 인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외출은 포기하고 말았다. 중간에 밥을 챙겨 먹을 때 말고는 온종일 방 안에 있었는데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어둠이 내려앉고 한참이 지나서야 눈이 떠졌고, 최근 들어 반복되는 두통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적막감이 공기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순간 이 무의미한 하루는 뭔가 싶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 고요함은, 여행을 떠나기 전 수십 번도 느꼈던 이 기분은 왜 지금에서야 다시 나타나버렸는지 모르겠다.
'여행이 끝나도 나는 여전히 이런 무의미한 일상만 반복하며 살아가게 될까?'
여행은 내 인생 최고의 도전이었다. 비록 직장, 돈, 결혼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라도 말이다. 기나긴 여행을 떠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품었다. 여행을 떠난 후의 나는 분명 예전과는 다른 사람일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심하게 하루하루를 낭비하며 살았던 그때의 초라한 여자와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하지만 햇수로 2년이 다 되어가는 그날, 나는 여전히 한심한 나를 보았다. 결국 제자리였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구나. 조금은 변했을지도 모른다던 희망은 이미 작은 조각들이 되어 흩어져있었다.
점점 희미해지는 여행의 기억을 붙들고 있는 지금, 나는 변하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중이다. 여행의 소감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내가 말하고는 한다. 여행을 떠났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더라. 그날, 한참을 울었던 바르셀로나의 작은 방 안에서 지인에게 들었던 말이 있다.
본디 인생은 무의미하지만 그 의미는 우리가 만들기 나름이라서 그 의미를 부여해보자면 충분히 잘 살아냈고, 예쁜 사진들이 늘었고, 멋진 추억들을 나눴지. 한 해가 지나 다시 봄이 온다고 늘 같은 봄은 아니듯, 제자리라고 생각했지만 분명 또 다를 거야.
가끔 나는 '이상'만을 바라보며 사소함을 지나치고는 한다. 이상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오만함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버린다. 그리고 그 오만함은 이번에도 떡국 한 그릇과 함께 소화되지 않고 위장에 바득바득 매달려 나를 바라본다. 너는 여전히 제자리라고 비웃듯이 말이다. 비록 인생이란 깊고도 넓은 바다에서 기나긴 여행이 끝났다고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대형 함선도, 시원하게 뻗어가는 모터보트도 얻지 못했지만 적어도 프리다이빙 자격증은 얻지 않았는가. 올해도 나는 저 멀리 지나가는 함선을 바라보며 오리발을 열심히 흔들고 있는 내가 때때로 비참해질 것이다. 쌓아온 사소함을 자주 잊어버릴 것이고, 오만함은 어느 때나 튀어나와 나를 비웃겠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다시금 깨달았으면 좋겠다. 물이 두려워 얕은 물에서 발장구만 치던 내가 지금은 발이 닿지 않은 깊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새해가 밝는다. 곧 새로운 봄이 찾아올 것이다. 작년과는 또 다른 봄이.
from.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