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첫째주, 하다 : 비로소

겨울호 첫번째 주제 : 시작

by 어느 저자

끝이 없는 바다의 수평선, 그 위를 뒤덮고 있는 새하얀 하늘 혹은 천장. 나는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서 가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른 채,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걷고 있다. 낮과 밤이 없으니, 날짜를 모르고, 날짜를 모르니, 시간을 모른다. 날짜라도 지정을 안 하면 정말 죽음을 인정하는 것 같아, 우울해질 때마다 내가 원하는 날짜를 정하여 새날을 맞이하는 척 다시 걸어본다


오늘은 삼일 차, 나는 살아있다.

3세기 전부터 세상은 결국 불멸약을 얻었다. 즉, 사람들은 자기가 원할 때 죽을 수 있다. 유한한 세상이 없어지고 무한한 세상이 온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에 따라 과학 기술 발전이 종식되었고 사람들은 그저 ‘유지’하는 삶을 추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유한한 삶에서의 어떠한 것들의 의미가 상실함에 따라 새로운 ‘것’들의 의미가 생성돼야 하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의 삶은 ‘유한’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들을 토대로 살아갔기 때문에 무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무한의 영역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일 수도..

결국, 무의미화에 따라 자살률이 50%에 달했다. 자살하는 방법은 다양해졌고, 심지어 여러 상품과 함께 특정한 자살 방법이 유행을 따랐다.정부는 인구 조절을 위해 이를 방임했다.

그래, 맞다. 예상했듯이 나도 그 50%에 속했다. 살아가는 것이 심심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불멸은 당연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가르쳐야 할 것들만 가르치고 혹시나 이해를 못 하면 언젠가 필요할 때 찾아보라며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런 선생님들이 유독 집착하면서 가르쳤던 과목은 ‘역사’와 ‘고대어’였는데 어쩌면 그 집착이 향수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라면 무한시대의 초창기에 살았던 사람들, 즉 무한시대 1세기 사람들은 불멸약이 개발되자마자, 기존의 직장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일들에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나라가 한동안 혼란스러웠는데, 그것 또한 일시적일 뿐 수많은 도전 끝에 자신들의 원하는 일들을 하였고 다양한 사람들에 걸맞게 다양한 분야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1세기까지만의 평화였다. 2세기부터는 무한이 당연했다. 태어날 때부터 무한이라, 시간에 따른 불안감을 느끼지 못해본 이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딱히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도전하려고 한 사람들이 없었고 오히려 미루기만 하였다. 한 학자는 이를 보고 인간의 습성은 유한에서 오기에 사람들은 절대 무한을 제대로 활용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시작과 도전에서 점점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달라진 삶이란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선생님께서도 이를 안타까워하시면서 설명하셨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이곳에서 살아있다. 아니 살아있는 건가? 나는 죽은 후에 이곳에 왔으니 죽은 건가? 아니면 살아있는데, 죽은 공간에 있는 건가? 그럼 나는 살아있는 건가? 그런 물음이 반복될 쯤, 길의 끝이 보이고 저 멀리 한 형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 형태를 띤 형체가 천천히 돛단배를 이곳을 향해 이끌었다. 차분하고 고요하게 나는 홀린 듯이 그 돛단배를 탔고, 그대로 몸을 실어 유유히 흘러갔다. 그는 파도 하나 치지 않는 이 바다에서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물질했다. 문득 돛단배에 탔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홀렸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걸어왔던 길이 안 보일 때 쯤이었다. 사실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도 무한한 것이 시간이라면 언젠가는 어디로 도착하겠지라는 생각뿐이었다. 가만히 따르는 것은 나에게 가장 익숙하고 일상이었던 일이다. 물론 혼자였다면 침묵을 유지한 채 멍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타인의 존재는 말이라도 걸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만들었다.

“ 혹시 당신은 사람인가요? 신인가요? ”

“ 세상은 그대가 아는 만큼 보인다. 고로 그대의 명명이 나의 존재이지. ”

“ 그렇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겠군요. ”

“ 그럴 수도 혹은 무한일 수도 있지 ”

“ 저는 여기서 무슨 존재인가요? ”

“ 너는 어떠한 것도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다. 그저 허물뿐이지 ”

“ 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그럼 지금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

“ 사람들은 내가 흐른다고 말하지만 그것 또한 그들의 선택이지, 모든 것이 선택이다. ”

“ 아니, 대체 그렇다면 저에게 주어진 선택지 뭐죠? ”

" 세상에 '주어진' 선택지란 없다. ”

” 그럼 저를 원래 위치로 데려다주세요. ”

“ 글쎄, 또 다른 배와 충돌한다면 갈 수도 있지, 당장은 안된다. ”

“ 이 넓은 바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 있겠어요? ”

“ 보이는 선택에 익숙해지면 선택지가 좁아진다. 눈 앞의 선택에 집중하지 말고 다른 선택을 찾아 그리고 시작해 ”

선택지가 안보이는데 무작정 선택하라니 만약 아무것도 선택을 안 한다면 평생 이러고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뇌 속에 거대한 솜뭉치가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료한 삶을 살기 싫어서 이를 끊어내려고 했는데, 다시 또 반복되는 상황이라니. 삶은 죽음으로서 끝냈지만 죽음은 무엇으로 끝내야 하는지. 이런 느낌을 고대 언어로 두려움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 순간 난생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심지어 그 끝도 모르는데, 시작을 하라니. 고대어 시간에 배운 두려움은 상상력이라는 날개를 달아 더 커진다고 했었는데, 정말 말 그대로였다. 갑자기 나타난 두려움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 또 다른 시간이 오는구나 ”

“ 네? ”

“ 어떤 이의 시간이 여기로 다가오고 있어. 어떤 이가 시작을 한거야 ”

“ 그게 무슨 소리에요 ? 네? 어디요? 시간이 다가오다니요? ”

“ 시간은 피할 수 없단다. 그저 .. ”

그 때였다. 고요했던 적막감을 깨고 내가 탄 것과 똑같은 돛단배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정확하게 우리를 향해, 천천히 강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 방향을 틀어요.!! 어서 방향을 아니 배를 멈춰봐요!!”

그는 말없이 지그시 나를 쳐다봤다. 마치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저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눈빛에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찰나에 다른 돛단배가 눈앞까지 왔고 그대로 부딪혔다. 결국, 나는 그 반동 때문에 돛단배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바닷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먼저 보인 것은 저 멀리 보이는 흩뿌려진 점들이었다. 그것들은 바다 위를 유영하고 있었다. 나는 하얀 배경의 높지 않은 사각벽들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 저건 당신이 걸어왔던 길이에요. ”

뒤돌아보니, 한 어린아이가 의자에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 누구세요? ”

“ 제가 아무개라고 해도 당신은 그대로 믿겠죠. 그렇다면 저는 아무나 될 수 있어요. ”

“ 저는 더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요. ”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저 나를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나는 그저 앉아서 저 멀리 보이는 점들을 바라봤다. 사실 점이라고 칭하기에는 불규칙한 모양들이었고,심지어 몇 개는 움직이기까지 했다. 저게 내가 걸어왔던 길이라고?내가 걸어온 길은 그저 일직선이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 당신은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먼저 물었다.

“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저 죽은 후에 온 곳이라고 알아요 ”

“ 끝까지 지루한 삶일테지요. 살았던 삶도 죽은 후에 삶도 ”

“ 끝이 보이지 않아요. 끝을 원했는데,”

“ 세상의 형태는 무한과 0이 맞닿아 있지요. 물론 제가 말한 세상은 당신이 아는 세상보다 훨씬 더 클거에요. 그리고 모든 단어는 그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어요. 하지만 현재 ‘生’이 무한으로 되니, ‘死’ 또한 무한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죠. 그것이 당신이 지금까지 여기에 있는 이유에요. 그리고 이에 따라 탄생과 시작이 밀리고 있어요. ”

“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

“ 시작이 안이뤄지고 있다는 말이죠. ”

“ 시작이 고대 어라서 잘 몰라요. 시작이 뭐죠? ”

“ 시작은 무질서의 근간 어입니다. ”

“ 무질서요? 무질서는 혼돈 아닌가요? ”

“ 맞아요. 하지만 혼돈이 꼭 나쁜 건 아니에요. 뭐든지 적절한 조화가 있어야 순환이 이뤄질 수 있어요. 오직 질서만 있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질서와 무질서는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데, 현재 당신이 살던 세상은 절대 질서(진리)가 나타났기에 그 의미가 퇴색하는 현상이 나타난 거에요. 그러기에 더욱 새로운 시작은 중요합니다.”

“ 하지만 저는 시작을 몰라요.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어떤 의미인지도, ”

“ 괜찮아요. 시작은 끝이 안 보일 때 정확하게 할 수 있어요. 0과 가깝고도 무한과 가까운 몇 안 되는 단어 중 하나지요. 단순합니다. 그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미는 것이죠. 그럼 시작이 시작돼요.”

“ 아아 너무 두려워요. 끝이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 아니에요? 무질서의 세계라니 … ”

“ 알아요. 두렵죠. 해가 뜨기 직전에 제일 추워지듯, 시작의 직전이 가장 두려움이 큽니다. 그러기에 시작은 누구나 어려워요. 계속해서 커지는 두려움을 안고 한 발 내디뎌야 하거든요.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그대를 무질서의 세계로 이동시켜, 새로운 선택지를 보여줍니다. 그 시작이 무엇이든 그대는 그 무질서의 세계를 관통하는 순간 무언가가 변할 것입니다.”

“ 저는 그래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어느 것 하나 바꾸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일평생을 이렇게 살았어요. 그저 주어진 대로….”

“ 당신은 두려움을 느껴봤으니,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그리고 그대는 이미 한 번의 시작을 했습니다. ”

그는 조용히 미소만 지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나,그는 벽을 향해 폴짝 뛰었다.그리고 그 위에서 천천히 천장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 사람도 몇 안 되는 0과 무한에 가까운 단어 중 하나에요. ”
천천히 그는 벽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점처럼 보일 만큼 멀어졌다.

적막감이 흘렀다. 혼자 길을 걸었을 때와 달리, 귀를 강타해오는 적막감이었다.천장을 보면 여전히 불규칙한 부유물들이 떠 있었고, 여전히 벽은 하얀색이었다.유일하게 변한 것은 빈 의자만 있다는 점이다. 처음 느껴보는 존재의 부재의 공허함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있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계속해서 읊조리면서….


오늘은 삼일 차, 나는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의자를 벽을 향해 던졌다. 벽이 깨지고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시작이었다.


from.하다



VDAkokg.jpg - 엘칼라파데로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귀국을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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