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첫번째 주제 : 시작
시작이 있으면 항상 끝이 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항상 우리의 삶 속에는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들만 있을 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렇게 시작과 끝은 항상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작과 끝은 항상 맞닿아 있다. 시작과 함께 끝을 봐야만 한다니 시작의 설렘을 무색하게 만들고 두렵게만 보이게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시작은 가끔 우리에게 시련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것들의 영원을 바라는 유약한 존재인 내가 시작하기 두렵게 만들었던 것들을.
가장 두려운 것은 사소한 것들이다. 사소하지 않은 것들을 그렇게 만드려는 노력, 그렇게 사소해진 것들을 그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 일은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명백한 사실들. 후자의 경우에는 그런 노력들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알 수 없는 것들도 관여한다. 사소한 것들은 사소해, 눈치채지 못하게 내 삶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나에게 쿡 박혀있다가 결국 도려내야하는 슬픈 것들 뿐이다. 또 사소하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과 어느정도 닮아 있어서 우리 주변에 사소한 것들은 당연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소중함이나 감사함은 항상 잊고 있다가 버리거나 이별 할 때 생각난다.
나의 경우에는 심지어 그런 이유로 물건도 잘 버리지 못하는데, 다 써버린 펜마저도 나에게는 깊게 남는다. 필통에서 그냥 당연히 꺼내서 쓰던 펜은, 나에게는 글을 쓸 때면 항상 쓰는 당연하고도 사소한 것이 된다. 그냥 펜 하나조차 그렇게 나에게 사소해지면, 다 써서 버려야 하는 아쉬운 마음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 꼭 사용해야만 그런 것도 아니다. 방문을 열었을 때 당연히 있는 것들. 그저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물건들마저 얼마나 깊게 박혀있는지, 도려내야 할 때가 오면 항상 그 날을 몇 번씩 미뤄대곤 했다.
펜 하나 조차도 나에게 아쉬움을 주는데 사람 사이 관계의 시작은 어떨까 생각하다가, 문득 그대와의 시작을 떠올려 본다. 사소함을 나누는 일이 너무도 즐거워 맞닿은 좋지 않은 끝을 정확히 알면서도 시작한 일. 가끔 사소하지 않은 문제들을 보이지 않는 벽에 걸어놓고, 서로가 좋아하지 않는 모습들도 저 멀리 쌓아놓았다. 그러다 그 모습들을 넘을 여력이, 생각이, 더 걸어 놓을 벽이 부족할 때 쯤 우리는 서로에게 사소한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당연한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아든 그 모습들이 너무도 많아 한번에 도려낼 수 없어, 도려내고 아물기를 여러번 반복해야만 했다.
이런 나의 경험들이, 시작하면 자연스레 사소해 질 것이며 끝에 도려내야 할 상황이 오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해 시작을 어렵게 만든다.
여러 이유들로 요즘 우리는 시작의 설레임 보다는 끝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있다. 당장 나도 이 글을 시작할 때 이 글을 읽은 후 당신의 표정을, 생각을 그리며 시작했다. 마냥 나쁜 방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에 있을 작지만 달콤한 성취감이라던지, 혹은 더 좋은 결과를 위한 힘든 과정을 견디는 힘을 얻기도한다. 하지만, 때때로 이 방식이 위험할 수 있다. 시작한 이유를 잊은 채 끝에만 집중하는 일이 그렇다. 달콤한 끝을 보고 시작하는 것과 시작한 이유를 잊지 않는 것. 이것이 시작을 두렵게 만드는 것들과 결과론적인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의 감사함을 느끼며. 새로운 시작을 위해
from.OH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