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못해서 호스텔 하루 문 닫은 사연
세계 어딜 가나 가전제품은 대부분 삼성 아니면 엘지다. 이곳 과테말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일하고 있는 호스텔에서 사용하는 세탁기, 건조기도 한국 브랜드다. 물론 그 회사들은 개인적으로 나와 관련이 없다. 아무리 한국 회사의 가전제품이 온 세계를 침투해도 내가 괜히 뿌듯해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그 제품에 어디 흠이 있어도 말이다. 하지만 막상 호스텔에서 우리나라 상표가 붙은 세탁기가 멈추고 나니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바로 알 수 없는 책임감이었다.
객실 청소를 담당하는 직원이 처음 출근하던 날이었다. 그는 대뜸 날 세탁실로 불렀다. 건조기 문이 안 열린다는 것이었다. ‘아 건조가 방금 끝나서 그런 걸 거예요. 조금 기다리면 문 열 수 있어요.’ 대답을 하고 나니 뭔가 어리둥절했다. 그는 왜 멀리 있는 날 굳이 이곳까지 불러 물어보는 거지,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역시. 네가 알 줄 알았어. 이거 한국 거니까.
난 그저 예전부터 건조기를 써서 사용법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제품이 어느 나라 브랜드인지 상관없었다.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브랜드 제품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다? 그건 그 동료의 밑도 끝도 없는 편견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정확히 그때였던 것 같다. 호스텔 세탁기와 건조기에 내가 알 수 없는 애착을 갖기 시작한 순간 말이다.
그날은 밤 근무를 서고 있었다. 올 손님들은 이미 다 체크인을 마친 상태였다. 다들 어딜 놀러 갔는지 숙소가 고요했다. 나는 몸도 움직일 겸 리셉션을 벗어나 괜히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뒷마당을 서성이다 오른편에 붙어 있는 세탁실에 눈길이 갔다. 요란하게 돌아가야 할 세탁기가 이상하게 잠잠했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들어서자 알 수 없는 오류코드가 반짝이는 채로 멈춰 선 그놈이 보였다. 다행히 통돌이여서 녀석의 속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빨랫감 위로 아직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세탁 진행 과정을 보여주는 불빛을 보니 탈수에서 뭔가 이상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어차피 빨래는 내 업무가 아니다. 낮에는 객실 관리 담당, 밤에는 경비원의 일이다. 하지만 역시 대한민국은 학연, 지연, 혈연 이랬던가. 지구 반대편에서도 그 녀석과의 지연이 날 끌어당겼다. ‘한국 사람이니 한국 회사 제품에 대해서 잘 안다’라는 동료의 어처구니없는 선입견도 한몫했다.
나는 구글 창을 켰다. 무작정 브랜드 이름과 함께 오류 코드를 검색했다. 다행히 같은 문제를 겪은 한국인이 관련 글을 올려놓은 게 있었다. 그 포스팅에 의하면 문제는 녀석이 놓인 위치가 균형이 맞지 않아서 멈춘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놈이 평평한 곳에 잘 놓여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물이 빠지질 않으니 좀 더 수평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세탁기를 움직였다. 소용이 없었다. 다시 ‘시작’ 버튼을 눌러도 탈수가 되기는커녕 이전보다 물이 더 높이 차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원 코드를 뽑았다가 다시 꼽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화면에 ‘13분’을 남기고 탈수가 이뤄지지 않았다.
오후 10시가 돼 밤 보초를 서는 동료가 도착했다. 나와 교대 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세탁기 고장을 알렸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며 그는 본인이 고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날 날이 밝아서도 그놈은 여전히 축축한 이불을 품고 있었다. 여전히 불균형 오류코드를 깜빡이며 물을 제대로 내보내지 않았다. 여긴 한국처럼 AS 직원이 단번에 달려오는 곳도 아닌 데다 심지어 그날은 주말이었다. 고장 난 세탁기 앞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다들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체크아웃 시간이 지나 청소 담당 직원이 다음 손님을 받기 위해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주말이어서 유독 오고 가는 손님이 많은 때였다. 세탁실엔 빨지 못한 침구류가 순식간에 탑처럼 쌓였다. 매니저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일단 ‘탈수’만 되지 않는 상황이니, 내 생각엔 어떻게 서든 몇 명이 붙어 손으로 물을 짜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나도 물론이다. 아무리 내가 그 녀석과 동향 출신이라지만 돈도 안 받는 Volunteer(인력 제공을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는 일을 하는 여행자)가 괜히 사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찔리는 마음을 안고 나는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월요일이 되자, 결국 호스텔 대부분의 방에서 손님을 받을 수가 없었다. 투숙객이 떠나고 난 자리에 갈아 끼울 이불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약 시스템에서 방을 막았다. 고객이 더 이상 예약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이 지경이 되도록 호스텔 사장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더 신경이 쓰였다. 괜히 그 세탁기가 한국 브랜드여서 말이다. 누구 하나 내게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내가 미안했다. 손으로 그 많은 이불을 짤 수가 없다면 가까운 세탁소에라도 들고 가야 하는 게 아닐까. 당장 지출이 생긴다 해도 하루 손님을 못 받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설령 금전적 손해가 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숙소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침구 탈수를 못해서 오늘 문을 닫습니다.’보단 뭐든 나을 것 같았다.
인간의 이기심이 정말 세상 발전의 원동력인 걸까. 숙소의 영업도 영업이지만, 일단 나도 더 이상 이 사태를 참을 수 없었다. 그간 내가 주말에 맞춰 내 빨래를 해왔던 터라 입을 옷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여행 다니면서 나는 손빨래를 종종 했었다. 두꺼운 겨울 옷도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물을 짠다 해도 그리 힘들 것 같지 않았다. 운동복과 섞여 냄새까지 시큰한 옷 뭉치를 껴안고 나는 세탁실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높게 쌓인 침대 시트와 이불 때문에 겨우 그놈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왜 하필이면 한국산이어서 날 불편하게 하냐?’며 발로 녀석을 한번 걷어찬 다음 옷과 세제를 넣었다. 도중에 멈출 걸 알면서도 평소처럼 세탁 세팅을 마쳤다. ‘에코 모드로 빠르게’.
그 후 삼십 분쯤 지나 옷을 꺼내러 갔을 때 녀석이 아무 불빛도 내뿜지 않은 채 잠자코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며칠 내내 떠 있었던 오류코드 없이 말이다. 설마 하는 마음에 세탁기 문을 들어 올렸다. 찰랑이는 물이 없었다. 심지어 옷이 흥건하게 젖어 있지도 않았다. 정상적인 탈수 과정을 거친 세탁물처럼 촉촉하기만 했다. 놈이 드디어 제대로 몸을 움직여 준 것이다. 난 당장 직원 단체 채팅방에 이 소식을 전했다. 팀 전원이 온갖 기쁨의 이모티콘을 쏘아댔다.
세탁기 고장의 진짜 원인은 너무 과도한 양의 이불을 한꺼번에 돌린 것으로 짐작됐다. 세탁기 용량의 반에 반도 안 차는 내 빨랫감은 무리 없이 소화됐기 때문이다. 용량에 비해 너무 많은 옷이 들어가 있어 놈은 제대로 물을 빼지 못한 듯했다. 이 깨달음 후부턴 우리는 한 번에 넣는 침구 수를 줄였다. 더 이상 녀석은 작동 도중에 멈춰 서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그제야 놈과 지연으로 얽혀 찜찜하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소위 한국 제품에 대한 ‘국뽕’ 가득 찬 게시물을 봐도 별 감흥을 느끼지 않던 나였다. ‘그 회사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라며 콧방귀 뀌었다. 나라 발전을 위해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구식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며 나는 항상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랬던 내가 한국 회사 상표가 붙은 가전제품에 이토록 끈끈한 감정적 연결고리를 가졌다니. 나로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최소한 앞으로 내가 일할 호스텔에 있는 한국 제품만은 아무 탈이 없었으면 한다. 부탁드립니다. 관계자 여러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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