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평단과 시네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작품이 있었습니다.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 르콩트 감독은 원래 한국인이었지만 지금은 프랑스인입니다. 아홉 살에 입양됐죠.
영화는 ‘버림받음’ 혹은 ‘혼란스러움’을 연상시키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 입양과 이주의 아픔을 다룹니다. 르콩트 감독의 데뷔작이죠. 감독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한국에서 첫 영화를 찍었고, 그 작품을 처음 상영하려 한국을 찾았습니다.
주인공 아홉 살 소녀 진희는 사실 감독의 분신입니다. 진희는 프랑스에 입양됐고, 계속해서 ‘버려지는’ 상황을 맞습니다. ‘여행자’는 작품성도 뛰어났지만, 주인공 소녀의 연기로 더 주목받았죠. 1970년대 중반 한국 고아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을 지지합니다.
BIFF에서 르콩트 감독을 만나 직접 인터뷰했는데요.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녀의 시선은 경계인의 시선이죠. 자기가 왜 버려졌는지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녀의 시선은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누구보다 감독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소녀의 시선, 그 눈빛을 배우가 연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진짜 주인공’인 감독 앞에서 말이죠. 그런데도 진희 역을 맡은 어린 배우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또 하나, 르콩트 감독은 아홉 살까지 썼던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상처는 잊지 않았습니다. “상처라는 것은 언제나 남아 있고, 치유되지 않습니다. 상처를 인정하고, 상처와 함께 살아간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르콩트 감독의 이런 바람을 응축된 눈빛 하나로 표현한 배우는 누구일까요. 바로 김새론입니다. 당시 김새론 배우의 나이도 르콩트 감독이 입양될 때와 똑같은 아홉 살입니다.
비꼬기 좋아하는 평론가들도 김새론 배우의 데뷔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직업적으로 영화를 보기에 웬만해선 극장에서 울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행자’를 보면서 수도꼭지처럼 줄줄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역 배우 김새론 양은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요.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란 사실을 저렇게 작은 아이를 통해 다시 깨닫게 되다니요.” “주인공 역을 맡은 김새론의 연기가 너무나 훌륭해서 한동안 진희로 살았던 그 꼬마 배우에게 심리치료가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맹랑하고 안쓰럽고 매서운, 김새론!” 유명 평론가들이 남긴 ‘한 줄 평’입니다.
그랬던 김새론 배우가 지난 16일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아홉 살 어린 배우가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군요. 안타까움이 너무 큽니다. 2009년 BIFF에서 작품으로 마주한 이후 그녀의 삶이 어땠는지, 솔직히 잘 알지는 못합니다. 활발히 활동하던 중에 2022년 5월 음주 운전 교통사고를 냈고, 이후 혹독한 시련을 겪은 것 같네요. 지난해 4월 재기를 시도했지만 여론이 좋지 않았던 듯합니다.
17일 동료 배우들의 추모가 이어졌습니다. 생전 과도한 악성 댓글을 문제 삼으며 이를 비판하는 글도 많습니다. 우선 ‘사람이 죽어야 악플러들 손이 멈춘다’는 매서운 지적이 나왔습니다. 김새론 배우 팬들도 성명을 냈습니다. ‘김새론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감당해야 했던 비난과 여론의 외면은 인간적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전문가도 일침을 놨습니다. 나종호 미국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조교수는 페이스북에 ‘잘못을 했다고 해서 재기의 기회도 없이 사람을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는 아닌 거 같다’며 ‘실수하거나 낙오된 사람을 버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흡사 거대한 오징어게임 같다’고 적었습니다.
잘못했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겠죠. 하지만 그 잘못의 정도와 크기를 훨씬 넘어서는, 한 사람의 생명을 벼랑 끝까지 밀어내는, 본질을 벗어난 근거 없는 비난은 멈춰야 하겠습니다. 더는 우리 사회가 ‘오징어게임’ 같지는 않아야겠습니다. 김새론 배우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