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뿐인 오늘
한때는 한 글자를 찍는 것도 힘들었던 내가, 다시 글 앞에 앉았다.
그렇다. 힘든 글쓰기 과정이 있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누굴 위해 글을 쓰는지, 이 글이 정말 내 진실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그러다 내 글 속에서 나의 순수함을 잃은 것이 보일 때, 더 이상 노트북을 펼치기도 힘이 들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다시 수년 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 나를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왔는지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지난 수년간 쌓인 시간들과 그 속의 내 오만 가지 감정 덕분에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시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나이테들은 나를 더 자라게도 했고, 또 나를 더 움츠러들게도 했으며, 나아가 나를 더 크게 점프할 수 있도록 심호흡을 가다듬게도 했었다.
그러고 보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의 경험도 우리는 그냥 의미 없게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라고 말한 것에 분명 일부 독자는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말 한마디 못 하던 우리가 신생아 병동에서 배고프다고 울음이라는 수단을 보여 준 순간부터 단 하나도 우리에게 쉬운 것은 없었을 터이니 저자의 의도가 간파되었으리라 믿는다. 한때는 가볍게 생각하고 여겼던 행동과 말 속에서도 지금 돌이켜보니, 나의 정체성과 그 당시의 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음을 마흔다섯이 지나고 보니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순간에 선택했던 방향들, 그 고민들, 그 결정들, 더 나아가 그러한 칭찬과 비난 모두가 당시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것을 후회할 수는 있을지언정 미워할 수는 없음을 이야기한다.
5년 전 내가 브런치로 글을 쓰게 된 것은 어쩌면 가벼운 결정이라고 여겼을 수 있지만, 마흔 살이 되면서의 나의 또 다른 정체성이 반영된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지금의 마흔다섯 살이 내게 주는 또 다른 정체성을 반영해 주는 새로운 갈림길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터닝 포인트라는 단어가 사실 먼저 생각이 들었지만, 이 단어를 내뱉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간지러운 것도 사실이었기에, 다른 단어로 대체해 보았다. 그렇다고 이 글을 계기로 앞으로 내가 대단히 생산성 높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줄 것도 아니며, 독자로부터 존경받고 신뢰할 만한 결심을 보여 줄 만한 지성감천(至誠感天)의 목표가 있지도 않다. 다만, 당신들이 걸어온 길을 나도 걸었으며, 나도 넘어져 보았으며, 나도 급한 마음에 뛰어 보았으며, 또한 나도 누군가를 밀치고 싶은 마음에 찰나의 고뇌를 해 보았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두 아이를 출산하여 혼자 육아를 해 보려 발버둥 쳐 본 경험이 있는 엄마, 한 푼이라도 아쉬워 목말라 있는 평범한 사무직 직원의 아내, 그리고 아쉽지 않을 만큼의 교육을 받아 본 대한민국의 보통 여성, 누구나 한 번은 겪게 될 자식의 사춘기를 지켜보는 엄마, 갱년기를 앞두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다짐하는 중년 여성, 뱃살이 너무 나와 단 몇 백 그램이 거추장스러운 통통한 여자, 입에도 올리기 싫었던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고도 앞으로의 미래를 잘 살아 보겠다고 입 꽉 깨물며 살아가고 있는 사십 대 여자. 이 모든 것들이 글을 읽는 독자와 한세상을 살아가는 작가로서의 좋은 명분이 될 테다.
사실은 지금도 프로 의식 높은 작가들만큼 글이 잘 쓰이지는 않겠지만, 머릿속에 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손끝으로 툭툭 튀어나오려는 생동감을 지닌 채 독자에게 전달되길 바란다. 오늘을 내 인생에서 다시 기억해 볼 날로 만든다. 2025년 9월 5일. 마흔다섯의 한 뱃살 나온 여자가 집 안 한 모퉁이 부엌 식탁에 앉아 시간이 지나 알 수 없게 변해 버린 아이스 카페라테를 마시며 내 인생 새 책장을 펼친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도 오늘이 그대들에게 아주 짧은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는 날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5분의 운동이든, 담배 하루 끊어 보기이든, 영어 단어 5개 외우기이든, 시 한 편 읽기여도 좋다. 오늘을 그날로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