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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Jan 11. 2024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

그 애의 좁고 깊고 따듯한 숲

-저희 집에 한 번도 안 오셨죠? 저희 집에서 맥주 한잔 해요.


그 애가 드디어 자신의 집으로 나를 불러들였다. 앞이 깜깜했지만 들뜬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우선 예쁜 애랑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란히 내릴 수는 없었으므로 맥주 몇 캔을 사 온다며 그 애를 먼저 집으로 들여보냈다. 

나 : 나 승용이랑 맥주 한잔. 늦어질 듯.
와이프 : ㅇㅇ


밥 먹다 말고 고향친구 승용이가 갑자기 집 앞으로 왔다며 서둘러 나온 터라 와이프에게 술 한잔 해서 좀 늦는다고 감정 하나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 이 시간에 와이프는 개인 유튜브를 찍는다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와이프는 요즘 아들이 쓰던 방을 스튜디오처럼 꾸며 영어수업 개인 유튜브를 찍어 올리는 귀찮은 일을 구상 중이다. 그러느라 온통 정신이 팔려있어 당신 남편이 뭘 하고 다니는지, 누굴 만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다행이지 뭔가.

나는 요즘 유행한다는 그 애가 좋아할 만한 하이볼 맥주 다섯 캔과 치즈볼과 딸기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그녀의 집 9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집에서 내릴 수는 없었기에 아무도 다니지 않는 비상계단을 이용해 하이볼이 들어있는 검은 비닐 봉다리를 들고 비장하게 한층 한층 올라갔다. 서너 층 올라가니 숨이 턱턱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음으로는 한방에 날아가 그 애에게 들어가고 싶었지만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까 그녀와의 입맞춤에 이미 나는 힘이 빠져버렸는지 모르겠다.

겨우 9층 그녀의 집 앞이다. 이미 머릿속은 아내와 아들은 잊은 지 오래다. 마치 홀가분한 젊은 시절의 더없이 꼿꼿했던 청년이 되어 그 애의 집으로 올라갔다. 

미리 열어놨는지, 살짝 열려있는 문 틈을 이용해 스르륵 바람처럼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집으로 입성했다. 벌써부터 그 애의 향기가 문틈으로 새록새록했다.

그녀의 집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같은 아파트지만 평수가 다 다른가보다. 스무 평 남짓 되는 방 두 칸 아담한 집이다. 스몰 라이프를 실천하는지 거실에는 작은 소파 하나와 꽤나 가격이 나가 뵈는 고급 오디오가 다다. 내가 들어가자 예쁜 애는 끈 달린 세상 편안해 뵈는 노란 원피스로 갈아입은 채 음악을 선곡하고 있었다.

작은 소파에 나는 앉았고, 예쁜 애는 내 무릎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 하이볼의 캔을 톡, 땄다.

잔잔한 경음악이 흐르는데 영화 OST란다. 나는 도통 알지 못하고 평소에 귀담아듣지 않았던 영화 OST들을 예쁜 애는 하나하나 눈을 반짝이며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 애의 설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와 맞닿은 무릎이 어찌나 뜨겁던지 더운 날씨도 아닌데 귀와 볼과 정수리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손으로 나는 끝내 그 애의 쇄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애의 좁고 깊고 따듯한 숲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예쁜 애랑은 이제 반존대로 말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직은 무사히 가까운 이웃사촌 정도의 관계처럼 근처 카페 야외테라스에 당당히 앉아 시간을 보냈고,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그녀는 내 앞에서 하루종일 종알거렸다. 어리디 어린 그 애가 늙어버린 나를 떠날까 봐 매번 전전긍긍했지만 불안한 만큼 그 애에게 헤어 나올 수 없이 순식간에 빠져버린 것 같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그녀의 오동통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근엄하게 커피를 홀짝이는 시간들을 즐겼다. 꿈같은 시간들이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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