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삶을 더 이롭게 하는가
매 순간을 합리화하며 살았다. 늘 위협적인 순간에, 불리한 순간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합리화했다. 그게 내 정신건강에 좋고,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가장 수월한 방법이었으니. 많이 아프고 좌절했던 순간엔 나만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찾아 그렇게 잘 넘겨왔다. 이 꼴사나운 인생에서 버티는 데에는 이것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자기 합리화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걸 뜻한다. 즉, 스스로 내 뇌를 속여서 죄책감을 모면하려는 태도다.
20살 때 카투사에 가고 싶었으나, 떨어지고 일반 육군에 입대한 뒤 나는 줄곧 원래 카투사를 바라지 않았다고 스스로 주문을 외웠다. 전역을 하고 나서도 가고 싶던 미국 인턴프로그램에 떨어지고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걸 하려고 했었다며 스스로를 속였다. 결국 미국에 다녀온 걸 보면 사실 당시 그보다 내게 더 가치 있는삶은 없었다. 플랜 B, C도 없는 와중에 그냥 단순히 떨어진 죄책감과 모멸감을 덜기 위해 스스로 주문을 걸었던 것이다. 미국에 갔다 와서는 어땠나. 취업을 할 때같은 회사에 4번을 지원했다. 심지어 일 년에 한 번 채용공고가 나는 회사였기에 무려 3년 9개월에 걸쳐 입사했다.
누구는 ‘끈기가 대단하다, 나 같으면 포기했을 것 같다’이런 분에 넘치는 덕담을 받는 그때까지도 사실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마음 한편 그동안 곪고 곪았던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였던 것이다. 긴 시간 동안 어차피 반복해서 지원할 거면서 떨어질 때마다 늘 더 좋은 곳이 있다고, 원래 내겐 여긴 후순위였다며 아무 죄 없는 회사를 까내리면서 그렇게 견뎠다.
내 인생은 자기 합리화에 익숙하다 못해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신념과도 같았다. 결국은 노력해서 이뤄서 들어온 회사라도 당시는 나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으면 모든 걸 놓아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 이후, 연애에 실패해도,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에도, 늘 똑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자기 합리화의 특징은 이런 목표지향적인 사람에게 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차례차례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뿌듯함을 느끼고, 마침내 그걸 이뤘을 때 성취감이 극에 달한다. 이때 타인보다 행복지수는 몇 배에 달한다. 근데 이 목표에 실패하면 큰 좌절감에 빠지고 이를 무마시킬 수 있는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찾게 된다. 그 대상이 없을 때에는 본인 목표를 애초에 부정해 버리는 무한악순환의 굴레에 빠진다. 즉, 바랐던 인생 목표에서 괴리감을 느낄 때 부정적 인지부조화에 취약해진다.
여우와 신포도 얘기가 대표적이다. 여우는 높은 나무에 있는 포도를 본인이 점프해서 먹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 포도를 그냥 질이 좋지 않은 신포도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면 본인 뇌가 편하거든.
또 다른 종류의 자기 합리화는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원래 바라던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나는 원래 고3 때 SKY대학교 입학을 목표했고, SKY대학교만을 꼭 가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는데 인서울 낮은 대학교에 갔다고 치자. 근데 그 힘들었던 입시를 또 하기는 싫고, 공부를 또 아주 못한 건 아니니, 그냥 내가 원래 목표를 인서울로 삼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래 목표했던 것을 낮춤으로써 스스로 그 환경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방법인데, 이 방법도 똑같이 인지부조화의 불편함을 본인이 인정하지 않아 발생하는 비극이다.
자, 이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오해한다. 이게 전에 설명했던 '오히려 좋아'같은 긍정의 마인드와 같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건 긍정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긍정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상황, 악조건 속에서 그 악조건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희망찬 내일을 바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 악조건에서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보고자 그 작은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좋게 생각해 보려는 게 긍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합리화는 현재의 상황을 본인 스스로가 애써 부정한다. 저 포도는 누가 봐도 맛있고 싱싱한 과일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모두가 그걸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걸 혼자 받아들이지 못해 이미 상한 포도라고 강제로 암시함으로써 스스로 뇌를 속이는 격이다.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아무리 지금 내 상황이 내 목표와 멀고 X 같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모두 자초한 것은 본인이고, 그걸 본인이 책임진 상황에서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상태여야만 한다. 그래야 이 자기 합리화는 긍정으로 마침내 치환된다.
우리는 스스로 인지부조화에 대한 불편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다. 자기 합리화를 하면 그 순간은편하다. 마치 거짓말을 하는 것과 똑같다. 거짓말을 기가 막히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상사가 00 과제를오늘까지 하라고 했는데 시작도 안 했다. 근데 거의 다 해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찌어찌 오늘을 넘겼다 치자. 그럼 내일은? 내일모레는? 거짓말은 무조건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기 합리화도 마찬가지다. 한번 하게 되면 본인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계속 또 다른 합리화를 낳고 서서히 본인의 삶의 질은 급속도로 떨어져 간다. 나는 최근 자기 합리화가 미래에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착각을 한 내 20대를 뼈저리게 반성중이다.
자, 30대에 접어들었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들수록 우리에게 자기 합리화보다 더 필요한 것은 뭘까. 바로 자기 객관화다. 자기 합리화에서 자기 객관화로 넘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늦으면 늦을수록 손해다. 언제까지 내 수준도 모른 채 허망한 꿈을 품고 있을 건가. 시간은 계속 가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뒤쳐지면서 살건가.
자기 객관화가 안된 노량진 9급 공무원 준비생이 있다고 치자. 이건 내 가장 친한 친구 경험담이다. 고등학교때부터 공부라고는 손에 댄 적도 없는 친구다. 근데 취업할 때가 되자, 본인 스펙은 없고 가장 공평한 게임이 공무원시험이겠다 싶어 준비를 시작했는데, 애초에 공부를 해본 적이 없으니 가장 기초적인 영어단어도 모른다. 근데 본인은 할 수 있다고 3년이나 버티다가 결국 그만두고 지금 다른 일용직 일을 전전 중이다.
자, 뭘 느꼈는가. 내 친구한테 부족했던 것은 딱 하나뿐이다. 바로 '자기 객관화'. 그것이 실제로 객관적으로 우월하든 열위에 있든 제삼자의 시각에서 본인이 어떤상황이고, 어떤 수준이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게 첫 번째다. 그 3년이라는 시간을 도대체 누구한테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가. 나는 3년은 최소 5억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 친구는 5억을 잃은 것이다. 이걸 하루빨리 아는 사람이 이 자본주의 게임에서 가장 빠르게 정상으로 갈 수 있다.
20대~30대 중반까지 각자가 자기 객관화를 했는데 지금 뭐 돈이 많다고 잘 나간다고 우쭐댈 것도 아니고 본인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다. 인생은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어떻게 이 마인드를 가지고 개척해 나가느냐에 따라 마라톤 끝에 웃는 사람이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 자기 객관화를 탑재하면 절대 안 망한다. 각자 기준에서의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만 기다릴 것이다. 근데 딱 한 가지, 30대 중반이 넘어서도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한 사람은 기필코 100% 망한다.
결국 합리화는 남에게 비치는 본인의 모습, 타인 의식과 과한 자존심, 열등감에 민감하기에 발생한다.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던 내적 허영심이다.
본인의 생각이 전부고, 본인의 선택한 결과가 전부라고, 무조건 옳다고 타인을 관철시킨다. 불가능한 일을 내가 생각했다면 당연히 할 수 있고 아니, 해야 한다고 믿는 지나치게 고전적이고 허울뿐인 망상일 뿐이다.
삶을 퇴행시키는 관념이다. 이에 반해, 자기 객관화는 본인 수준에 맞는 미래에 대한 명확한 계획을 세우게 돕는다. 그 어떤 방해물이 있더라도 자기 객관화 하나로 스스로를 더 나은방향으로 의식화한다.
오늘이 내 삶의 가장 젊은 날이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일상에서 자기 합리화를해왔던 사람이 있다면 하루빨리 자기 객관화로 치환하는 것이 남들이 안 가진 행복과 성공을 쟁취하는 지름길임을 알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