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현대인에게 제일 중요한 화두는 뭘까. 돈을 많이 버는 것? 가족, 친구 챙기며 건강하게 사는 것? 결국 종착지는 ‘시간’이다. 결국 앞에서 말한 두 가지도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가능여부가 결정되는 문제다. 최저시급이 왜 법적으로 정해져 있을까를 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두 시간 일한사람에게 한 시간 일한사람 보다 더 돈을 많이 주라는 의미다. 당연 시간을 더 투여할수록 버는 돈도 달라진다. 단, 자본주의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방법 자체가 노동의 가치로 돈을 버는 사람보다 자본으로 또 다른 자본을 낳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 문제지. 이 자본가들이 결국 본인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원리도 돈을 소비해서 남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내년 서른이 되는 96년생이 내년이 너무 설렌다고 내게 말했다. 20대가 어땠든 간에 두 달 뒤의 새로운 30대는 본인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값지게 보내고 싶단다. 그 설렘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몇 개의 단어들이 조금은 잔소리로 변질돼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위의 썸네일과 같은 말을 똑같이 했다. 어느덧 돌아보니 3,4년지나있기에 더 적극적으로 시간을 움켜쥐어야 한다고.시간을 움켜쥐라는 고찰은 단순히 시간을 안 가게 잡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영역이다. 쫓기게 바쁘게 살아라는 의미도 아니다. 바로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만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시간을 채우라는 뜻이다.
현대사회, 특히 한국은 모든 게 획일화됐다. 교복이며 교육이며, 직업이며, 아파트며, 하물며 길거리 사람들의 옷차림까지. 외관 디자인도, 방의 크기도 모든 게 같은 그 콘크리트 공간을 몇십억 주고 사는 게 한국이다. 직업은 대기업/중소기업으로 양극화되어 있고, 교육은또 어떤가. 굳이 교육뿐 아니라 학교에서 생애주기별 주입시키는 사고가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본인만의 개성을 보여주세요!
중학교: 개성, 취향 다 묵살하고 공부만 시켜.(기본)
고등학교: 개성, 취향 다 묵살하고 공부만 시켜. (심화)
대학교: 다시 본인만의 개성을 보여주세요!
딱 이렇다. 이 와중에 어떻게 각자만의 생각과 독자적인 삶을 꾸릴 수 있겠나. 그러니까 대학생 되면 학생들이 본인의 꿈을 찾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똑같은 교육만 받다 결국 이젠 뭘 해야 할지 모르거든. 이젠아무도 시키는 사람이 없으니까.
시간을 움켜쥐는 첫 번째 방법은 매사에 본인만의 색깔을 입히는 것이다. 이게 난 인생의 전부라 본다. 남들이 아무리 틀렸다, 망했다 해도 그게 본인 색깔에 맞는 거라면 그 삶은 누가 뭐래도 성공한 삶이다.
이 색깔을 그럼 어떻게 입히냐. 먼저 본인만의 가설을 세우고, 그게 맞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겪어보는 것이다. 그것이 글이 됐든, 직장인의 일이 됐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가 됐든, 음식을 만드는 자영업자가 됐든. 소설가는 대부분 본인의 개요를 짜두고 혹은 2/3를 다 적어두고, 소설 배경의 현장에 가 마무리 방점을 찍는다. 해외출장을 가는 직장인도 보고를 할 때에 이미 다 계획안과 보고서의 개요를 전부 다 짜 놓은 다음, 현지에서 마무리를 한다. 그 주체가 그게회사에서 시킨 거든, 본인이 생각한 거든 늘 본인의 철학에 기반한 가설을 세우고, 그걸 확인해 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 가설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본인만의 색깔이 뚜렷해진다. 그게 맞아가는 횟수가 많을수록 내 철학이 맞았다는 확신이 서고 자신감에 살을 붙인다.
예를 들어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를 깊게 공부해 보자는 가설을 세웠으면 거기에 맞는 해외석사과정을 했을시 어떤 성과나 이로움이 있을지를 예상하고, 다음학기에 그냥 가서 공부하는 것이다. 타코라는 음식에 관심이 생겨 가게를 차려보고 싶다는 가설을 세웠다면 어떻게 요리하는지, 어떤 재료를 쓰는지를 공부하고 멕시코에 그냥 가서 확인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가설을 많을 필요는 없으나 그 가설이 본인의 인생에 꼭 필요하다는 전제는 있어야 한다.
우리가 친구들과 맛집에 가면 음식사진을 찍는다. 그 이유는 인증하기 위해서일수도, 기록하기 위해서일수도 있다. 어쨌거나 본인이 그 음식을 좋아하니까 긴 웨이팅을 뚫고 먹으러 간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상도 내 지식의 범주나 경험이 확장되는 예시다. 근데 사전에 그 음식 혹은 장소에 대해 본인이 겪어보고 싶다는 감정이 먼저 일어야 한다. 그래서 가설이 중요하다. 여행도 정해진 휴가기간 한 군데만 갈 수 있다면 어딜 가나.당연히 본인이 가장 가고 싶고 좋아하는 곳에 간다. 남들이 좋다고 아무생각없이 가지 않는다. 타인에게 이끌리지 않고 취향이 확실해야 그게 진짜 내 가설이 되고 검증 뒤 내 진짜 재산이 된다.
다음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계속 (본인 기준에서)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주입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렉카들의 장난질, 맞춤법도 틀리는 이들의 의미 없는 유튜브나 뉴스 댓글들, 정치싸움, 대기업들의 주식 무빙에 본인 인생을 휘말리게 해서는 안된다. 더 나은걸 보고, 영감들 얻고 그 영감을 나만의 방식대로 정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세상에 내보내야 한다. 내가 좋다고 생각한 이 영감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나처럼 다른 나라 가고, 책 읽고 안 해도 시간이 없어도 그걸 한 번에 알 수 있도록.
내 뇌는 늘 망상과 독백으로 가득 차있다. 한 사람이 계속 혼자 말하는 이 독백은 누군가에게는 지루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드라마나 소설에서 이 독백은 전체 플롯전개에 필수적인 장보를 제공한다. 심지어 청중이듣기 때문에 Raw 한 표현을 넘어 양식화되고 표현적인 방식으로 늘 만들어져야 해서 표현하기가 늘 쉽지만은 않다. 인터넷엔 1초마다 새 영상이 올라오고 매일 뉴스에 새로운 정보로 도배되는 시대에 어쩌면 나는 가장 비효율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오랜 생각 끝에 고민해서 나온 결과물이 누군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방법론들이 세대를 막론하고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그것이 영상이 될 수도 있고, 만화일 수도 있고, 팟캐스트처럼 녹음을 할 수도 있는데 왜 글로 풀고 있는가. 글 쓰는데 왜 이렇게 내 시간을 많이 쓰는가. 그 이유는 배신하지 않는 가장 원초적인 기록법이라 그렇다. 원시시대 때도 문자는 있었다. 이 문자, 글은 어떻게든 기록이 되어 남기 때문에 내가 살아온 모든 흔적을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무언가 새로 다시 쌓을 필요 없이 과거의 글을 활용해 그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기와 같은 거다. 예를 들어보자.
한 취업준비생이 회사에 입사원서를 넣었다. 100대 1 경쟁률을 뚫고 서류합격을 했다. 다음은 인적성검사를한다. 정해진 시간에 인터넷에 접속해 카메라를 보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 제한시간 안에 문제를 푼다. 어떤 회사는 아예 학교로 불러 종이시험을 치기도 한다. 여기서 50%가 갈려나가고, 또 합격을 했다. 다음은 1차 면접, 직무인터뷰, 토론인터뷰, PT발표까지 장장 5시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결국 합격을 했다. 근데 마지막 임원면접에서 대답하나 잘못해서 최종탈락.
그러면 이 준비생은 멘탈이 나간다. 왜? 억울해서? 취업 못할까 봐 걱정되니까? 아니다. 이유는 하나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니까. 이게 힘든 거다. 쌓아놓은 돌들을 모래성처럼 한 번에 다 무너트리고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근데 글을 쓰면 그렇게 하지 않고, 중간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저장을 시켜준다. 이래서 나는 이 중요한 30대에 글을 쓰고 있다.
또 글은 본인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준다. 본인의 가설과 계획을 남들한테 말하고 다니면 그걸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다음 달까지 살 5kg 뺄 거야!라고 떠들고 다니면 타인의 눈들이 많으니 부끄럽지 않도록 하게 된다는 논리다. 근데 난 반대다. 일단 사람들은 기본전제로 본인에게 관심이 없다. 살을 빼든 말든 큰 관심이 없기에 말하고 다녀도 얻을 게 없다. 또 사람은 본능이 본인보다 잘 되거나, 거창한 계획과 가설을 떠들어대는 사람이 있으면 ’그 목표가 안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제일 친한 몇 명 빼고 가족 빼고. 그리고 뒤에서는 질투와 시기를 한다. 얻을 게 없다. 이때 글로그걸 혼자 표현하면 강한 동기부여와 함께 실제 그걸 이루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 난 새로운 가설과, 더 나은 걸 주입하고 글로 표현하고자 지금 중국 충칭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