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talk, 독인가 약인가
'Small talk'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작은 말들, 조용한 순간을 어색하지 않게 채우기 위해 중요하지 않은 대화를 함을 뜻한다. 미국에 가면 버스기사 아저씨, 회사에 경비원아저씨, 심지어 나는 스타벅스에서 같이커피를 기다리는 모르는 사람과도 스몰톡을 한 적이 빈번하다. 오바마가 재임하던 시절, 전 세계를 통솔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대통령 직책에도 불구하고건물 청소부와 하이파이브와 짧은 대화를 나눠 화제가되기도 했다. 그때가 생생히 기억나는데 한국에는 ‘진짜 리더의 자질’이라고 소개됐다.
이처럼 스몰톡은 사전적 정의처럼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에만 주목적이 있다기보다는‘나는 너의 적이 아니다’ 즉, 상대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팍팍한 현대사회에서 따스한 말 한마디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회생활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스몰톡이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다. 일상적으로 오랜만에 카톡을 주고받는 무리끼리 밥은 먹고 다니냐 라던지, 요즘 별일없냐? 라던지 사소한 안부를 묻는 것도 다 스몰톡의 일환이다. 사실 관계는 아무리 친했어도 시간이 지나면 멀어진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그렇게 소원해져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시절인연이다.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의 어색한 상황을 깨기 위해 스몰톡을 하는 과정은 어쩌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서로 간의 짧은 연결고리라도 찾아야일도 잘 되고, 공통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달성률이 높아지는 법. 스몰톡을 하는 이유는 일단 서로에게 사소하게나마 얻을 것이 있다는 반증이니.
비즈니스적 상황에서의 예를 들겠다. 멕시코에서는 비즈니스미팅 2시간을 한다고 하면 앞에 한 시간은 스몰톡이다. 오는데 안 피곤했는지, 여기 관광지는 어디 가봤는지, 음식 입에 잘 맞는지, 너는 왜 이 일을 하게 됐는지, 결혼은 했는지, 너는 가족이 몇 명이고, 가족이 뭐 하느냐까지 다 물어본다. 놀랍겠지만 진짜다. (가족중심사회이기 때문이다)
중국도 똑같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중국과 비즈니스를 하기 굉장히 힘들다. 아니, 힘든 게 아니라 아예 못한다. 성사확률은 0%. 그래서 남자의 경우 중국 해외영업을 하는데 술을 못 마신다? 면접에서 아주 높은 확률로 떨어진다. 그 이유가 단지 중국인들이 술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들은 서로 술도 마시며 두터운 관계를 장기적으로 쌓아나가야만이 믿음이 생기고 돈이 오가는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어디서 시작하나. 술을 처음 첫 잔 서로 줄 때 비즈니스 얘기할까? 아니다. 당연히 스몰톡얘기다. 스몰톡은 한국뿐 아니라 이렇게나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가된다.
근데 요즘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이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 노력과 시간을 투입하면 즉각적인 보상을 바로 원하는 현대인들은 (특히 10대, 20대) 이 짧은스몰톡마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굳이 내가 이 사람과 친해질 이유가 있나? 나한테 이득 될 것이 하나도없는데 왜 그래야 하지?’ 라며 다짜고짜 용건만 말하는경우를 보면 간혹 당황스럽다. 이를 세대 간의 차이라고 단정 지어야 할지, 아니면 개인의 감정문제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물론 본인과 맞지 않는 사람과의 스몰톡은 관계를 더 악화시키고, 조직의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도 틀린 말은 아니라 스몰톡의 존재여부에있어 의구심이 든다.
과거에는 호의적이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이 미덕이었고, 사회생활의 일부분이었다면 이젠 본인에게 필요한 것만 찾게 되고, 그 필요한 것을 찾는 과정에서의 스몰톡만 의미 있는 세상이 됐다. 스몰톡이 꼭 필요하다는 당위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관계 간의 소원함과 무관심함을 스몰톡의 부재 속에서 느낀다는 게 개탄스럽다.
스몰톡뿐만이 아니다. 요즘 10대나 20대는 대화자체가 없다. 스몰톡은 어쩌면 유연하게 빅토크 즉, 서로 간의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발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발판을 놓을 필요가 없을 만큼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삶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각자의 관심사가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자녀의 교육문제 때문에 화가 날 것이고, 누군가는 연봉이 너무 작아 고민이고, 누구는 개인 시간이 없어 고민일 것이다.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아니,해결이 아니더라도 상담은 받을 수 있는 누군가와 ‘대화’라는 걸 해야 하는데 이 마저도 스마트폰 SNS에 올리거나, 홀로 시간을 보내며 말수를 점점 줄여간다.
나는 20대로 보이는 커플이 카페에 왔는데 각자 음료를 시키고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 경우도 봤다. 심지어 한두 번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고질병 우울증, 청년고독사, 고립 모두 이런 현상이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원인이 왜 생겼다고 생각하는가. 왜 스몰톡은 중요도가 나날이 줄어들고 대화의 시작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걸까를 생각해 보면 이 스몰톡은 원래 우리나라 문화가 아니다.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예의를 중요시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한국에 가져올 때 이를 잘 변형시켜서 들고 와야 했다. 근데 이는 한국패치화되어 스몰톡의 단점만 가져온 것이 가장 주된 원인이다. 누군가 관계의 어색함을 풀려고 스몰톡을 시도하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고 단정 짓고, 단순히 예의를 차리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한다. 즉, 듣는 상대는 그냥 ‘시간낭비’라 여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장님이 월요일에 출근해서 주간회의를 할 때 주말에 뭐 했냐고 스몰톡을 할 수 있다. 당연히 물어볼 수 있다. 근데 그걸 ‘하려는 얘기나 할 것이지 왜, 개인 사생활을 물어보냐’와 같이 삐딱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반대로 정치판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그렇듯이) 선거 시즌이 되면 상대 후보자를 노골적으로 까내린다. 험한 욕까지 섞어가며 상대를 까내려야만 본인이 그 자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당위성이 부여된다. 트럼프 봐라. 이민자추방에 대해 이민자들은 개 잡아먹는다고 근거도 없이 까내리지 않나. 상대의 약점을 잡아 치명적인 근거가 나올 때까지 파고들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화법이다. 나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죽여버리는 한마디로 본인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한국은 스몰톡의 장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걸 배워온다. 한국의 정치판이나, 100분 토론, 대학생 토론현장, 면접장토론장을 면접관으로 참여해 보면 다 이렇다. 상대의견을 약점을 잡아 까내림으로써 본인의의견을 정당화하는 걸 가르치고 배운다. 어차피 상대를 이기러 이 자리에 왔는데 내가 ‘오늘 날씨가 어땠나요? 춥진 않았나요? 식사는 하셨나요? 부모님은 어때 잘 계시고?’ 이런 스몰톡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이다.
현대사회는 본인이 돋보여야 살아남는 시대다. 시간이있을 때 본인 한마디 더하고, 본인 어필하기 바쁘다.
피티발표를 할 때나, 누군가 스피치 연설을 할 때를 생각해 봐라. 청중들은 초반 1분 남짓 눈길은 주겠지만 사실상 발표자의 그 모든 걸 진지하게 본인얘기처럼 듣는 사람은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10분짜리 유튜브 영상 하나 못 봐서 1분짜리 쇼츠로 넘어온 시댄데, 어떻게 참을성을 가지고 남의 얘기를 다 듣고 앉아있나. 이 와중에 그런 상대에게 안부를 묻는 스몰톡을 먼저 건넨다? 택도 없는 소리다.
스몰톡 안에는 서로 간의 암묵적인 정이 있고 믿음이 있다. ‘너에게 큰 관심은 없지만 난 너를 헤치지 않으며우린 적이 아니야, 서로 상생하고 돕는 관계야’라는 인식이 자리 잡혀 있어야 정상이다. 그건 포장마차에 우동을 파는 할머니가 될 수도 있고, 내 직장상사가 될 수도 있고, 하물며 지나가는 강아지가 될 수도 있다. 즉 스몰톡이 이 세상에 많을수록 삶은 풍요로워진다. 근데 더 이상 이 스몰톡은 한국에서 관계의 안전망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게 참 개탄스럽다. 대화의 시작이 곧사람 간의 벽을 허물고 목소리를 내면서 의미 있는 결과물을 함께 도출할 수 있는 시발점인데, 이게 없어지는 게 참 안타깝다. 모두가 사람에게 친근한 닥스훈트가 되어야한다는 게 아니다. MBTI의 E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 따뜻한 한마디가 이 공동체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다는 걸 우린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