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거절의 이로움
현대사회의 미덕을 얘기할 때 늘 나오는 단어가 있다. 절약, 저축, 청결, 배려, 관용, 존중 등.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미덕 안에 꼭 포함되어야 할 것은 거절이 아닐까 한다. 그것도 완곡한 표현이 아닌 '확고한 거절' 말이다.
최근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의 다문화 스피치대회를 관람했다. 그중 인상 깊었던 발표자가 있었다. 이 발표자는 한국사회에 적응하며 유독 어려웠던 것이 이 완곡한 거절에서 오는 커뮤니케이션 오류였다고 한다.
특히, 외국인 입장에서는 가능여부를 묻는 <Can>과
<Can't>의 의미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그래야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던지,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알아보던지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이는 꼭 외국에 살지 않아도 여행을 할 때에도 느낄 수 있다. 특히 영국 영어의 경우 동양인들이 Can과 Can't의 발음을 모호하게 발음하기에 실제로 현지에서 서비스업과 같이 고객을 응대하는 직업에서의 불만이 적지 않다. 증시도 그렇다. 외국인들의 자본이 빠지면 귀신같이 차트는 내려간다. 단순히 돈냄새를 잘 맡는다를 떠나, 그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수용 자체를 힘들어한다.
이는 비단 외국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미래를 예측만 할 뿐,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고자 교회에 가 기도를 하거나 절에 가서 종교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 간 소통에 있어 가능여부를 묻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명확한 의사전달이 필요하다.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을 보자. 발표자는 한국사람들의 이 말을 이해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넘길 이 문장은 사실 Can와 Can't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말이다. 특히 외국인에게는 더더욱. 힘들어도 본인을 위해 노력해 준다면 가능하다고 해석했다고 한다. 마음속으로 응원도 했다고. (^^)
근데 우리 한국인들은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이것이 거절의 의미라는 걸 모두 알고 있다. 이 단어가 파생된 근원을 보자면, 남에게 피해주고 싶지 않은 혹은 상처 주고 싶지 않은 완곡한 거절의 표현의 대표적인 사례다.거절은 해야겠고, 상대방에게 예의는 갖춰야겠으니 입에서 나오는 말이 결국 저렇게 될 수밖에. 근데 이게 점점 더 커질수록 상대 간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대에게 원하지 않았던 기대를 심어줄 수 있다. 그 순간 상대에게 상처를 덜 준다 할지라도, 본인이 나중에 편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거절은 완곡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피력해야 한다고 본다. 강력하게 본인의 의사를 표현한들 기본적으로 말귀 못 알아먹고 그렇게 받아들이지않는 사람도 이 세상엔 널렸거든.
본인이 오해받고, 추후 피해를 보지 않을 상황에 있기 위해서는 청자를 위한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본인 즉, 화자를 위한 대화를 해야 한다. 성추행, 성희롱, 직장 내 괴롭힘 등 일상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문제에서도 명확한 본인의 의사표시를 한다면 문제의 수위도줄일뿐더러, 예방까지 할 수 있기에 효율성 측면에서 훨씬 더 적합한 방법이다. 특히나 이 명확한 거절은 사회생활에서 빛을 발하는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타인의 일까지 도맡아 거절도 잘 못하고 있으면 본인만 호구되는 거다. 월급은 똑같고 맨날 야근하고. 어차피 상대는 본인의 일을 도와준다 해서 크게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그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유독 한국인에겐 이런 분명한 거절은 매우 취약하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늘 상대의 눈치를 보고, 본인이 중심이 아닌 본인이 속한 조직, 혹은 타인이 중심이 된 삶을 살도록 획일화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늘 다수의 입장에 소수가 희생되어야 하기에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하고, 본인 의견하나 자신 있게 못 내는 그런 시대가 됐다. 짜장면집에 가서 팀장님이 짬뽕시키면 다 짬뽕을 시키고, 다 같은걸 시키든 말든 '볶음밥'을 먹겠다는 인원은 극소수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본인 의견을 말하면 MZ니 뭐니, 짓밟아버리는 꼰대들이 선진문화를 막고 나아가 이렇게 2차 피해, 3차 피해까지 번지게 한다.
완곡한 거절을 했을 때 본인이 이로운 점은 딱 하나뿐이다. 바로 상대방이 듣기에 크게 기분 나쁘지 않아 한다는 것?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실제 내가 겪은 일이다. 얼마 전, 친한 동생의 결혼식이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가지 못했다. 그 동생은 내게 갈 수 없는 이유를 물었고, 축의를 하면서 분명하게 사정을 말하고 미안하다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식 당일까지 전화가 와 왜 오지 못하냐고 재차 물은 적이 있다. 본인의 경사에 이토록 나를 신경 써주는 건 고마웠지만, 계속 상대에게 미안해해야만 하는 내 모습을 상대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 조금은 불편했다. 이건 분명한 거절임에도 불구하고 재차 상대를 힘들게 한 사례다. 결국 어떻게나 '본인'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상대에게 서운함을 미안함으로 계속 받아내려 하는 것이다. 강력하게 말을 해도 이런 사례가 생긴다.
결혼식을 얘기하니 떠오른다. 내 결혼식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핏줄에다가 친분이 두터웠던 사촌동생이기에당연히 결혼식에 올 줄 알았는데 온다, 안 온다 두리뭉실하게 얘기하다 그는 결국 오지 못했다. 이는 앞선 예시와 달리 완곡한 거절의 부작용 사례로, 당사자에게여지를 남기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럴 바에 이런 여지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거절을 할 때에는 더 강력하게 피력하는 게 낫다. 어떻게든 본인에게 일어나는 귀찮은 재발을 막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은 없다. 그건 신도 못하는 것이다. 종교가 나뉘는 것도 해당 종교를 믿지 않는 집단이 당연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일적으로 엮이거나, 특정 이해관계가 섞여있을 때엔 더더욱 그렇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친구사이에도 의절하고, 결혼한사이에도 이혼하는 마당에 오죽하겠나. 그래서 비즈니스적으로 감정이 상한 누군가가 있다면 예전관계를 되돌리기가 굉장히 힘들다.
당연히 사람은 본인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렇게 짜여있는 인간의 본능, 아니 시스템이다. 그걸 역이용해 우린 이제 더 강하게 거절해야 한다. 두리뭉실한 의사표현으로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2차 피해로 내 삶이 더 망가지는 기회비용이 훨씬 더 크다는 걸 이젠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