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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박 날지 아무도 몰라

우리가 말하는 우연과 운

by 홍그리

서울역 저녁 7시. 한겨울 퇴근길, 모두가 온몸을 싸매고 분주히 이동한다. 나는 역 앞에서 멀뚱히 누군가를 기다리다 그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고기를 먹으러온다.그는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처럼 chill하게 입었다.


이 벅차오르는 감정은 도통 숨겨지지 않는다. 그는 십 년 만에 만난 내 멕시칸 친구다. 이름은 랄로. 십 년 전, 멕시코 한 시골마을에서 나와 둘이 일 년이 넘도록 한 방을 같이 쓴 사이. 즉, 막역한 사이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열정 하나만 믿고 그는 엔지니어, 나는 무역업의 꿈을 찾아 푸에블라라는 도시에 왔다. 엔지니어로 성공해 달러를 벌어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가는 게 그는 꿈이라 했다. 사백 원짜리 타코 하나, 싸구려 데낄라 한잔에도 우린 그렇게 행복했다. 그런 그가 십 년 만에 한국에 멋지게 옷을 입고 비즈니스 출장을 온 것이다.


이미 세월이 야속하게 늙어버린 우리. 10년간 쌓아왔던 말들은 이 짧은 저녁사이 털어놓기엔 너무 부족하기만 하다. 랄로는 내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한없이 놀라기만 한다. 하나 확실한 건, 어릴 때 입이 닳도록 얘기하던 여자, 술, 파티, 언어, 여행, 옷, 게임, 스포츠가 주였던 우리 대화는 어느새 돈, 재테크, 결혼, 행복을 말하고 있다는 것. 막연한 꿈 하나만 믿고 묵묵히 그자리에서 공부했던 그는 어느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잘 나가는 엔지니어가 됐고, 나도 꿈은 아닐지라도 내 밥벌이는 어느 정도 하며 살고 있다. 그 자체가 감격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포기만 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뭐라도 된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당시 우리 룸메들은 멕시칸인 네가 어떻게 미국에서 엔지니어를 할 수 있냐며 놀리고 비아냥댔다. 근데 지금 내 앞에 있는 랄로가 보여준 연봉명세서엔 190k가 찍혀있다. 190,000달러. 한화로 2억 7천만 원이다.

미국은 환율상 차이가 있으나 6 figure salary. 숫자가여섯 자리라는 뜻으로 100k가 어림잡아 한화로 연봉 1억 4천 정도 된다. 세금제외 후 한국의 연봉 1억보단 넉넉하진 않지만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수준이다. 근데 2억 5천이라니. 인생은 진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멕시코는 파티를 할 때 본인의 술은 각자가 사가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는 초대받은 집에서 본인들이 가져온 술을 함께 마시며 파티를 즐긴다. 그 가져갈 술 살 돈도 없어 내게 100페소, 200페소 빌리던 친구였다.

그럼 이 친구가 매 순간 인생을 성실히 살고, 본인을 자기계발하면서 극적인 성공을 이뤄낸 거냐. 그것도 아니다. 일자리를 구하는데 아주 힘들어했다. 내가 아는 것만 최소 3년을 날렸다. 그러다 드론 관련 논문을 우연히 인터넷에 기고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어느 드론 회사가 연락을 해 스카웃을 제의했다고. 본인이 악착같이 본인의 몸값을 올린 것도 아니고, 알아서 회사 측에서 그 고연봉을 먼저 제시한 거다. 어쩌면 그렇게 인생이 잘 풀릴 수 있냐며 감탄하는 내게 그는 대답한다.


행운은 우연처럼 너도 곧 찾아올 거라고.


각자에게 주어진 것에 행복하게 성실히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돈이든, 관계든, 행복이든, 운이든 그렇게 우연처럼 찾아올 것이라 한다. 오히려 연봉이 얼마고 이런 건 본인에게 하나도 안 중요하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멕시코는 가톨릭 문화라, 하나님이 다 도와주신다고 그냥 그렇게 말했다.

종교가 다른 누군가에겐, 원하는 걸 꼭 쟁취해야만 하는 누군가에게는 이 소리 자체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근데 실제로 우연처럼 행운이 깃든 그가 말하는 것이 신빙성이 전혀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Dios, te bendiga(신의 축복이 함께하리라)"


하나님이 늘 너의 곁에서 도와줄 거라는 말이다. 나는 천주교도 아니라 실제로 그럴 거라는 확신은 없다. 근데 숫자로 가치를 매기는 것에만 집착하면서 넘쳐흘러도 부족함을 늘 가지고 사는 한국 현대인에 대한 반추로는 충분했다. 돈으로 우월과 열등의 기준을 삼는 이 시대에서 내 자아 그리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일에 이렇게나 무심한데 어떻게 진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편안하게 생각할수록 더 안온함과 행복이 깃드는 법이다. 행운이 오는 것도 마찬가지.


현대인은 늘 해야 할 것을 무조건 해야 한다는 집착아래 살아왔다. 입시, 취업, 결혼, 가정, 일, 육아••• 타인과 비교하면서 조금이라도 시기가 늦거나, 뒤처진다는생각이 들면 인생이 무너진 기분이 들고 패배자 취급을 받는 것만 같다. 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좋은 결과만이 그 과정 전체도 좋은 거라 스스로 미화한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냥 시간만 날린 꼴. 결국 그 준비하는 과정에서 행복한 순간, 배운 순간, 의미 있는 시간들이 분명 있어도 스스로가 부정한다. 가령, 공무원준비를 3년동안 한 공시생이 있다고 해보자. 끝내 3년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다른 일로 전향해서 간간히 돈을 벌고 있다. 그런 그에게 그 공무원 준비 3년간의 시간은 날린 시간인 것이다. 누군가에겐 시험에 불합격한 것이 어쩌면 결과론적 관점에서 다행이었던 사람도 분명 있을 텐데 말이다. 내 친구는 말한다. 엔지니어로써 행운을 잡을 수 있는 노력은 당연히 최소한 필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논문을 쓰거나, 미국을 염두해 영어를 매일 공부하고, 우연히 생길 수 있는 더 큰 일의 씨앗을 꾸려간 것이 본인 인생에 훨씬 좋았다고. 본인 동기 중에 엔지니어로 진로를 삼은 친구 중, 미치도록 그것만 파서 노력한 사람들도 본인보다 연봉이 낮고, 제대로 된 직장을 못 잡은 사람도 부지기수라고. 즉, 아무리 미치도록 노력해도, 인풋이 많았다 해서 정비례하게 아웃풋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절대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큰 교훈을 얻으며 우린 그렇게 일어섰다. 그렇게 2차에갔다. 친구가 평소에 먹고 싶어 했던 김치전을 먹는다. 친구는 한국식 김치피자가 너무 맛있다며 소주를 들이켠다. 이젠 그가 고민이 있단다. 누구나 불안을 안고 산다. 당연히 꿈을 이뤘다해서 모든 게 행복하지만은 않다. 2차에 오자마자 드디어 속에 있는 본인의 스트레스와 고민을 얘기한다. 미국에서 연봉도 잘 받고, 전 세계를 누비는 그에게도 고민이 있다니. 고민의 원인은 원초적이다. 그냥 외롭단다. 직장에서의 직무 특성상, 전 세계 법인에 드론 작동법이나, 엔지니어로써의 기술을알려줘야 해서 해외를 여기저기 다니고 있는데, 그래서 누굴 만날 시간이 없단다. 과거에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오랜 해외출장 끝에 모두가 본인을 떠났다고. 오히려 결혼을 한 내가 부럽다고. 일 년 365일 중에 150일이 넘게 해외에 있으니, 연애도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겠지. 나는 곧장 얘기한다.

“네가 원하는 그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우연처럼 찾아올 거라고.


그런 그가 활짝 웃는다. 인연은 우연히 찾아온다고. 지금 이렇게 각자 다른 걸 이룬 우리는 또 서로 다른 본인의 결핍이 보인다. 근데 이 결핍이 마냥 싫지만은 않다.더없이 완벽하면 너무 재미없고 시시하거든 인생이.

그렇게 우연처럼 다가올 행복하고 좋은 날을 기대하며연거푸 술을 마신다.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건, 마치 걸리지 않을걸 알면서도 로또복권을 사 지갑에 넣어놓는작은 희망 같은 것. 계속 꾸준히 사다 보면 3등, 아니 4등, 5등이라도 걸리겠지. 그럼 뭐 어때. 지금 이 과정자체가 행복했으면 됐지.

어느덧 밤 11시. 뜨거운 포옹 후, 작별인사를 했다.


“Que te vaya bien, no adios, sino hasta pronto mi mejor amigo!(진짜 안녕이 아니라, 곧 또 보자. 조심히 가)


뜨거운 포옹 후 집에 가는 길, 바람이 차다. 술도 마셨겠다, 길이 빙판길이라 조금은 돌아서 간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너도, 나도, 이 거리도 어쨌든 또 다른 길이 다 있다. 우리 잘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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