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사고의 민낯
주말 흔히 볼 수 있는 강남역 풍경을 보자. 이 불경기 속에서도 강남 미용실, 성형외과, 피부과는 남녀노소발 디딜 틈이 없다. 레이저제모를 하려면 예약을 잡지 않으면 할 수도 없다. 강남역 11번 출구 약속장소 앞에 서있으면 다양한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지하철역 앞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왜 이렇게 살이 쪘냐며 핀잔을 준다. 옆에 또 다른 만남의 어느 연인은 싸우고 있다. 그 싸움을 대충 들어보면 여자친구는 오늘 뭐 달라진 것 없냐며 상대를 추궁한다. 그러다 발견하지 못하면 삐져버린다. 강남 한복판의 타임스퀘어를 방불케 하는 간판들에는 날씬하고 이쁜 여자와, 잘생긴 남자들이 멋진 옷을 입고 광고를 한다. 이 상황에 한없이 익숙해진 우리는 그렇게 정해진 암묵적인 룰에부합하도록 자기 관리를 하면서 현생을 산다.
살이 쪘다고 놀림받는 친구는 양껏 취하고 다음날부터헬스장을 끊을 것이고, 싸우던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의마음에 들기 위해 혹은 자기만족을 위해 더 이쁘게 꾸밀 것이다. 남자도 이에 맞게 더 외모를 가꿔 데이트를 할 것이다. 그리고는 해당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이 외 사람들을 핀잔하며 속으로 한심해한다.
편한 친구사이도 똑같다. 하지 말아야 할 민감한 질문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이 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하다. 피부가 안 좋아졌니, 뚱뚱하니 등등 얼굴평가, 이른바 '얼평'에 우린 이미 익숙하다. 연예인만 봐도 우린 가장 먼저 얼굴에 대한 평가부터 시작한다. 운동선수라면 운동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라면 그 분야의 실력을 보지 않고 얼굴에 집중한다. 얼굴뿐만 아니라 사는 지역, 아파트, 연봉, 직업 심지어 직접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간접적으로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안달이 난 사람도 주변에 많이 겪었다. 즉, 여기서 관계 자체는 평가 없이는 형성될 수 없는 그런 곳이다.
키도 작고 서구적 몸매가 아닌 아시아인에서 나온 열등감이라 하기엔 그 수가 절대적으로 많다. 겉모습이 곧 스펙이 되고, 그 사람의 인성, 태도, 모든 면을 아우른다. 절대 밥 먹여 주지 않는 '체면'이 한국인을 잘못된 방향으로 집어삼키고 있다. 소개팅에 나가든, 모임에서 어떤 한 사람을 만나든, 새로운 직장상사를 만나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든 우리는 결국 가장 첫인상으로 외모를 보게 된다. 그 외모가 어떤지에 따라 인생을 어떤 척도를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가늠하는 요소가되는데, 한국에선 이게 절대적이다.
더 무서운 건 이 첫인상이라는 것이, 낙인효과를 불러온다는 거다. 한번 찍히면 부정적인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직접 오랜 시간 동안 겪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볼 수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것만 그냥 믿는다.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이 사람은 깔끔한 사람인지, 꼼꼼한 사람인지, 바른 사람인지 본인 마음대로 단정 짓는다. 그리고 그 낙인 이후에 이 사람이 전혀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면 본인의 생각이 틀렸다고생각하지 않고, 가끔 있는 이벤트가 있거나 특정한 사유가 있다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낙인이 무서워 그 첫인상이라는 것에 목숨을 걸어 끊임없이 외모를 신경 쓰고 관리한다.
내가 있던 멕시코에서는 어떤 안경을 꼈는지, 수염을 기르는지, 키가 얼만지, 내가 무슨 신발을 신었는지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단, 내가 파티에 가는데그들은 대체적으로 왁스를 발라 머리를 올려서 멋을 내고 누구는 머리를 내리는 방법의 차이일 뿐. 왜 오늘 머리를 올리지 않았느냐의 질문은 받은 적이 있다. 또 미국에서는 살이 찌든, 여드름이 나든 상대에게 그 어떤 얘기도 서로 하지 않는다. 매우 실례되는 질문이거든. 그냥 속으로 생각만 할 뿐이다. 예외가 있을지언정 최소한 내 경험 안에선 그랬다.
왜 유독 이곳 한국에서는 트렌드에 이토록 민감하고 남들이 해야 하는 건 다 해야 하고, 남에게 보이는 행복을 이토록 중요시 여기는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이는 우리가 서구적이지 않아서, 신체적으로 우월하지 않아서, 인정욕구가 유독 강해서도 아니고 공동체문화가 낳은 답습에 불과하다. 같이 함께 성실히 노력해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루고, 늘 함께 나눠먹고, 융통성이 부족할 정도로 철저히 규율을 지키며 살아온 이 민족성은 타인의 행동과 관습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한 개인도 공동체의 기준에 따라가지 않으면 눈치를 보게 되는 사회가 되어 스스로를 옥죈다. 따라서 이 공동체가 정한 기준에 본인이 실제로 부합한 지 시도 때도 없이 잰다. 그중 외모는 가장 우선순위다.
예를 들어보자. 남들이 아파트 살면 그걸 이루지 못한 본인은 괜히 비아냥대며 질투와 시기를 하고 서서히 그 관계는 경제적 격차로 인해 멀어진다. 공부를 못하는 누군가가 있으면 부모는 잘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라고 핀잔을 준다. 지적능력이든 경제적 격차든, 수준 높은 공동체에 소속되길 바란다. 그중 외모가 유독 한국인에게 치명적이고 예민하게 자리하는 부분이다. 중고등학교 일진무리를 생각해 보면 답은 나온다. 일진무리는 어떻게든 유행을 선도하려 하고, 교복을 줄이거나 늘려 입으며, 화장을 하거나 외모관리를 철저히 한다. 그리고 그와 어울리는 겉모습을 가진 자만이 사실 그 무리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보통 그 사람은 돈이 많거나, 심부름꾼이거나, 그들이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소개팅을 해도 똑같다. 결혼정보회사는 남녀를 한우 등급 매기듯 A부터 F까지 철저한 기준에 맞춰 이성을 매긴다. 그 기준은 나이, 학력, 집안, 외모, 재산, 직업 등으로 주로 분류되는데 여성은 외모와 나이가 그중에서 평가요소 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왜 그럴까. 그래야 남자들이 더 좋아하고 성사될 확률이 높아 결정사는 성혼 수수료를 벌거든.
아직 미혼인 여자인 친구에게 남자소개를 받을 건지 물어본다. 어떤 스타일을 바라냐고 물으면 "키는 얼마 이상에, 적어도 수입이 나정도는 됐으면 좋겠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반대로 남자인 친구에게 여자소개를 받을 건지 물어보고, 어떤 스타일이 좋냐고 묻는다.
이쁜 여자
이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가 된다. 이거 하나면 된다. 외모에 죽고 못 사는 거다. 현실이 그렇다.
외모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외모와 옷차림은 꾸미지 않은 것보다 꾸민 게 더 이익을 보는 경우는 스스로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뿐이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성형외과에 가 수술을 밥먹듯이 하고, 피부과를 주 몇 회씩 가며, 외모를 최상으로 올리는 데 내 인생을갈아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연예인 할 것 아니면.그 시간에 본인의 소비습관을 점검하며 자산형성을 하는 것이 훨씬 미래에 도움이 된다.
자기 관리는 삶의 질을 높여주나,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쳐 타인을 강요하거나 기준이 타인이 되면 관계며, 본인의 정신건강이며 둘 다 잃는다. 소탐대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동체의 부작용 외모지상주의에서 조금 한 발짝 떨어져 관조할 때가 아닐까 한다. 내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본인이 그런 사람임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성숙이다.